지퍼 발명에 뛰어든 기드온 순드바크

지퍼 발명에 뛰어든 기드온 순드바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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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드선이 하지 못한 일을 해낸 사람은 1880년 스웨덴에서 태어난 오토 프레데릭 기드온 순드바크였다. 그의 부모는 비옥한 농장과 벌목장을 소유했기 때문에 기술 분야에 소질이 있는 아들을 독일 학교에 보낼 수 있었다. 1903년 그는 전기공학 학위를 취득했다. 집으로 돌아와 군복무를 마친 젊은 순드바크는 미국으로 이주했다. 당시 미국에는 공과대학은 몇 개 없었지만, 산업경제가 점점 성장하는 추세여서 많은 엔지니어가 필요했다. 순드바크는 자기 이름에 붙어 있는 유럽식 장식을 떼버리고, 실용적으로 단순하게 G. 선드백으로 불리기를 바랐다. 그는 피츠버그 근처에 있는 웨스팅하우스 전기회사에 일자리를 얻었고, 나이아가라폭포 발전소의 대형 터보발전기 설계 업무를 담당했다.

피츠버그는 오토매틱후크앤드아이사의 재정 후원자들 대다수가 거주하는 펜실베이니아 미드빌에서 멀지 않았고, 선드백은 지나다니는 길에 자연스럽게 그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마침 상사와 잘 지내지 못하고 있었던 터라, 그는 오토매틱후크앤드아이사의 입사 제안을 받아들였다. 입사 면접을 위해 뉴저지주 호보켄에 있는 공장을 방문하기로 약속했는데 그곳에서 매우 숙련된 기계직공인 애런슨을 만났다. 애런슨은 저드선의 기계가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작동하도록 결함을 진단하고 고치는 일을 하고 있었다. 호보켄에 머무는 동안 선드백은 애런슨의 딸이자 나중에 부부의 연을 맺는 엘비라와도 만났다. 1908년 무렵 선드백은 오토매틱후크앤드아이사 및 그 후계자들과의 장기간 합작사업에 참여한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그의 예리한 눈은 제조상 결함을 찾아냈고, 기술적 전문성은 그 결함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부추겼다. 완벽주의자인 그는 새로운 기회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그 일을 맡았다."

선드백은 스스로 잠그개의 문제 속으로 완전히 빠져들어 갔으며 해결할 방법을 찾기 위해 밤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먼저 시-큐리티의 '툭 터져 열리는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후크를 완전히 감쌀 수 있도록 고리를 확장했다. 시-큐러티가 회사의 명성에 손해를 입혔으므로 개선된 제품은 특허출원을 하기도 전에 "시-큐러티가 완벽해졌다"는 광고와 함께 '플라코'라는 이름으로 신속하게 알려졌다(1913년에 발급된 미국 특허번호 1,060,378호는 지금까지 지퍼 도입의 이정표로 인정받고 있다). 광고에서 "단추, 후크, 걸쇠는 이제 플라코 앞에서 모두 사라져버렸다" 고 주장했지만, 기쁜 소식은 오래가지 못했다. 선드백도 회사 비서가 플라코를 단 바지를 입고 파티에 참석했다가 문제가 생겨 급히 집에 돌아와 안전핀으로 옷을 수습했다는 비참한 이야기를 털어놓기도 했다. 해결해야 할 결함은 아직도 많았고, 소비자들의 거센 불만이 엔지니어들의 책상 위에 수북히 쌓이고 있었다.

오토매틱후크앤드아이사는 미국에서의 특허권을 소유하되, 외국에서의 특허권은 선드백에게 양도하는 것에 동의했다. 1910년 파리에 거주하던 그의 장인이 프랑스에 있는 공장을 지원해 '미제 만능 잠그개'를 설립할 후원자를 찾아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중단되었다. 강재 값이 1파운드에 5센트, 주급 6달러이던 시절이 지나가면서 미국에서의 사정도 악화되었다. 직원도 줄어서 선드백과 다른 한 사람만 남았다. 선드백은 경영, 엔지니어, 공장장 및 사환 일까지 모든 역할을 도맡아 했다. 이미 존에이로블링즈선즈사에 수천 달러의 빚을 졌지만, 나서서 판매원을 설득해 더 많은 원자재를 공급하도록 매달리는 것도 그가 할 일이었다. 당시 존에이로블링즈선즈사는 실패한 잠그개부터 성공적인 현수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강재를 공급하는 회사였다. 선드백은 인쇄비 대신 기계를 수리하거나 클립 만드는 기계를 고안해주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어려움에 봉착할 때면 항상 새로운 응원군이 등장했다. 극작가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임스 오닐은 변신에 능한 예술가로서 <몽테크리스토 백작>으로 전국 순회공연을 하던 중이었다. 그는 플라코야말로 하늘이 보낸 선물이라고 생각해 회사 주식을 사들였고 개발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한 후원과는 대조적으로 선드백은 극심한 좌절에 빠졌다. 아내인 엘비라가 산후에 사망한 것이다. 절망에 빠진 그는 슬픔을 잊기 위해 오직 잠그개에만 온 정신을 집중해 매달리기 시작했다. 결국 '과거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를 택했고, 항상 '치명적'인 말썽을 일으킨 후크를 제거하는 데 몰두했다.

그가 만든 새로운 모델에는 한쪽에 스프링클립, 혹은 무는 부분을 설치했다. 다른 쪽에는 테이프 가장자리에 구슬 모양을 달아, 무는 부분에 감싸여 서로 맞물리도록 배치했다. 슬라이더가 위로 올라오면서 쐐기작용으로 턱 사이를 벌려놓으면 구슬 모양의 가장자리가 열린 턱 속으로 파고들어가도록 디자인했다. 턱이 구슬 모양의 가장자리를 물어서 조이고 ··· 후크는 필요가 없었다.

아마 선드백은 클립 제작기계를 연구하다가 아이디어를 떠올렸을 것이다. 새로운 미끄럼식 잠그개는 1912년에 특허를 출원해 1917년에 특허를 취득했다. 워커 대령은 손으로 만든 초기 샘플을 본 후 무척 좋아하면서 그 장치를 '숨은 후크'라고 불렀다. 그러나 선드백은 대령에게 보내는 편지에 재정형편이 매우 나빠 공장을 돌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새로운 '숨은 후크'는 플라코를 대체할 수 있는 제품으로 손색이 없습니다만, 주문을 받으려면 제작할 수 있는 재료와 시설이 있어야 하니 몇 개월이 더 걸릴 겁니다" 라고 적었다. 몇 주 후 그는 다시 편지를 썼다.

확보한 강철과 테이프의 품질이 적합하다고 해도 '숨은 후크'를 시장에 내놓는 것은 아직 옳지 않은 듯합니다. 몇 가지 문제를 발견했습니다. 단점이 꽤 심각하지만 바깥부분을 다소 보완하는 방법으로 고칠 수는 있겠습니다. 다만 그런 경우 외관이 썩 세련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선드백은 성능부터 미관까지 모든 것에 걱정이 많았지만, 워커 대령은 아직 용기를 잃지 않고 있었다. 1913년 초기에 받은 특허권들의 만료기한이 다가오자 투자자들은 회사를 재편하는 데 관심을 보였다. 오토매틱후크앤드아이사의 주주들은 연례 정기총회에서 회사의 모든 자산을 팔기로 합의했고, 곧이어 후크리스파스너사가 설립되었다. 선드백은 공장을 호보켄에서 미드빌의 작은 헛간으로 옮겼다. 미드빌 주민들은 별난 도구를 만드는 정체불명의 회사가 마을에 들어온 것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후크 없는 잠그개나 비슷한 장치에 대한 워커의 집착을 아는 많은 사람들은 그가 거리로 나서면 "빨리 건너자고. 대령이 오잖아. 회사 주식을 사달라고 귀찮게 할 거야" 라고 수군거렸다. 그러는 사이 선드백은 비좁은 공장을 최대한 활용해 수없이 많은 실험을 시도하면서 새로운 기계장치를 설계해나갔다.

선드백은 미드빌로 옮겨온 후에 바로 공장을 정상화하려고 조바심을 냈다. 후크리스 1호로 알려진 스프링클립 장치는 실패했지만, 초기 슬라이더 잠그개 디자인과는 원리 면에서도 매우 다른 구조의 제품인 후크리스 2호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차례로 끼워 넣는 컵 모양의 요소들로 구성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게다가 선드백은 잠그개 제작에 꼭 필요한 기계를 만들어냈다. 잠그개의 간편한 작동에 걸맞은 단순한 조작만으로 서로 맞물리는 금속으로 된 요소들을 단 한 번의 공정으로 찍어냈다. 1913년 12월 후원자들에게 혁신적인 제품의 성공을 발표했을 때 그들이 그렇게 담담한 반응을 보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선드백은 고백했다. 그러나 대령이 언젠가는 잠그개 아이디어가 성공할 것이라고 특별히 믿고 있었기 때문에, 막상 성공했을 때는 오히려 무덤덤했으리라는 점도 그는 알고 있었다.

출처 : 《포크는 왜 네 갈퀴를 달게 되었나》 - 헨리 페트로스키 지음 / 이인식 해제 / 백이호 옮김 -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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