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 : 제 2의 셰익스피어, 제인 오스틴의 걸작

"오만과 편견" : 제 2의 셰익스피어, 제인 오스틴의 걸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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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의 소설. 몰랐는데 오만과 편견을 다 읽고 나서 찾아보니, 제인 오스틴은 1999년 영국 BBC방송의 '지난 1000년간 최고의 문학가' 설문 조사에서 극작가 셰익스피어에 이어 2위에 오른 작가라고 합니다. 문득 궁금하네요, 3위부터 10위까지 작가의 순위가 또 1999년에 조사한 거니 가장 최근에 조사한 것은 없는지도요. 어찌됐든 과장해서 말하면 제인 오스틴은 제 2의 셰익스피어, 여자 셰익스피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불룩하게 뒤로 튀어나온 오리궁둥이 치마, 꽉 조이는 코르셋의 복장, 차양을 드리우는 모자 등 영국 상류층 여성들의 복장은 어린 시절부터 숱하게 접해 온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익숙하실 겁니다. 오만과 편견 또한 영화화가 많이 되었고, 역시나 영국 상류층 여성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고전에 기반한 영화는 별로 선호하지 않는 탓인지 오만과 편견을 영화로 본 적은 없습니다. 또한 로맨스 소설이라는 말을 들어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읽어야 할 것들이 많이 있는데, 즉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처럼 선과 악에 대해 고뇌하며 인간의 밑바닥까지 긁어내는 소설들이 "고전"이라는 말을 듣기에 마땅하다는 믿음 같은 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읽게 됐냐고요?

누군가 재미 있다고 했습니다. 21년은 소설이라면 치를 떨던 제가 소설로 발을 내딛게 된 시기이며, 굳이 소설을 읽어야 한다면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담겨져 있는 고전소설들을 읽어야 한다는 신념을 깨진 해이기도 합니다. 소설은 치열한 어떤 고민들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는데, 그걸 완전히 깨준 책이 바로 기욤 뮈소의 책들이었습니다. 그 첫 책이 바로 기욤 뮈소의 “구해줘”였습니다. 아직 안 읽어보신 분들에게는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소설이 이렇게까지 재미 있어도 되는 것일까, 소설은 진중해야 하잖아, 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렇게 재미 있으면 평생 책을 잡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조차 책을 가까이 하겠구나, 라는 그 나름의 유용함을 인정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하면 기욤 뮈소처럼 재미있는 소설을 쓸 수 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제가 기욤 뮈소의 소설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행복감을 느꼈으니, 저 또한 그렇게 한 번 써 보고 싶었습니다. 기욤 뮈소 뿐만 아니라, 내가 쓴 소설도 사람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본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후로 재미있다는 소설들을 되도록 많이 보려고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너무 가벼워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 역시나 아직까지는 대중소설은 가벼운 것이다, 라는 인식은 깨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 세계고전문학 읽기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만과 편견'은 대중소설이 추구하는 재미와 세계고전문학이 추구하는 문학성과 깊이를 동시에 엿볼 수 있기에 상당히 매력적인 선택지였습니다.

'오만과 편견'이라는 제목을 들을 때마다 어린 저는 왜 로맨스 소설인데 제목을 저렇게 지었을까, 하고 궁금해 왔습니다.

영어로는 Pride and Prejudice.

알파벳 P로 시작하는 두운법으로 원제를 지었는데 한국말로 옮기면서 그 맛을 잃어버렸습니다. 영어에 관심이 많았던 저는 늘 이 부분이 아쉬우면서 제 딴에 머리를 굴려보곤 했습니다.

오만과 오판.

이 정도가 제가 생각하기에 원제의 두운법을 살린 가장 적절한 번역이었지만, 소설 내용을 읽지도 않은 제가 그렇게 강력하게 주장할 수 없었기에 어디 가서도 제 의견을 말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보니, 나쁘지 않은 제목 같습니다.

제목 이야기를 좀 길게 늘어놨는데,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1. 소설 속으로

생각해 보니 제가 이 책을 어릴 적부터 몇 차례 시도를 해 봤습니다. 물론 원서로 도전을 했습니다. 집에 영어원서가 있습니다. 한때 꽤나 영어공부에 빠져 들어서 영어원서 읽기를 즐겨 했었습니다. 하지만 대중 소설은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으나 - 재미도 있고 문체나 어휘수준이 가벼워서 - 고전을 원서로 읽는 것은 상당히 버거웠습니다. 일단 어휘가 예스러워 술술 읽기가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영어 원서로 접한 첫 문장은 저에게 거부감을 주었습니다.

It is a truth universally acknowledged, that a single man in possession of a good fortune, must be in want of a wife.

However little known the feelings or views of such a man may be on his first entering a neighbourhood, this truth is so well fixed in the minds of the surrounding families, that he is considered

the rightful property of some one or other of their daughters.

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꼭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

이런 남자가 이웃이 되면 그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을 거의 모른다고 해도, 이 진리가 동네 사람들의 마음속에 너무나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그를 자기네 딸들 가운데 하나가 차지해야 할 재산으로 여기게 마련이다. - 민음사

아마 이 도입부가 책을 더 이상 읽기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었을 것입니다(물론 영어원문이 어려운 것도 한 몫 했습니다).

전형적으로 고리타분한 도입부.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속물주의 가치관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작금의 현실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재산이 많은 남자들이 아니라, 어느 쪽이든 일정 수준의 자산을 갖추지 않고서는 결혼은 생각도 못하게 되는 시기니까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남자라서 어쩔 수 없이 남자의 시각에 편향될 수밖에 없는 탓인지 아직까지는 남자의 재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지만 말입니다.

소설은 빙리라는 런던의 재력가가 롱본에 집을 얻어서 이사를 오면서 시작됩니다. 롱본에는 베넷가가 있습니다. 베넷가는 다섯 명의 딸을 둔 가문입니다. 오롯이 다섯 딸을 재산이 많은 남자에게 시집을 보내는 게 인생 목표인 베넷부인과 그런 것에는 애초에 별로 관심조차 없는 베넷씨.

빙리가 오고 열린 무도회에서 빙리는 베넷가의 첫째 딸 제인에게 반합니다. 제인도 빙리가 마음에 듭니다. 빙리와 함께 온 빙리의 친구 다이시도 무도회에 동참합니다. 다이시는 무엇보다 빙리보다 훨씬 재산이 많고 성직자 임명 권한까지 있는 어마어마한 집안입니다. 그런데 다이시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그 재력과 권력에 따른 오만함입니다. 그런 오만한 태도를 사람들은 무척 싫어합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다이시 앞에서는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습니다. 괜히 찍힐 이유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베넷가의 둘째 딸인 엘리자베스는 다이시 앞에서 대놓고 싫은 티를 냅니다. 그만큼 자기 주장이 강하고 자립심이 강한 여자입니다. 그런 엘리자베스에게 다이시는 관심이 생깁니다. 그래서 곧잘 둘이 눈이 마주치는데, 그때마다 엘리자베스는 화가 납니다. 본인이 전혀 마음도 없는 남자가 자신을 계속 쳐다보니 부에가 나는 모양입니다.

빙리와 제인의 마음이 무르익고, 곧 혼사가 성립될려는 찰나에 빙리는 잠깐 런던에 다녀오겠다고 말하고는 몇 개월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언니 제인을 위로하지만, 제인은 무척이나 낙담합니다.

그때 위컴이라는 장교가 나타납니다. 위컴은 다이시 집안의 집사 아들입니다. 위컴은 잘 생긴데다 친화력도 좋아서 롱본의 모든 사람들이 위컴을 좋아합니다. 당연히 엘리자베스도 이성적으로 위컴에게 호감을 느낍니다. 위컴은 다이시에 대해서 말합니다. 다이시가 얼마나 오만하고 형편 없는 사람인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빙리가 안 돌아오는 이유도 다이시가 빙리를 자신의 여동생과 결혼시키려고 하는 계획 때문이라고 귀띔합니다. 또한 다이시가 다이시의 부친이 죽기 전에 위컴에게 주라고 했던 성직자 자리를 자신에게 주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사실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엘리자베스는 다이시의 태도를 통해서 어느 정도 짐작은 했었는데, 오컴의 말을 통해 다이시의 성향에 대해서 확신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다이시가 롱본에 돌아옵니다. 여전히 빙리는 런던에서 돌아오지 않고 혼자 말입니다. 돌아와서는 어느날 다이시는 엘리자베스에게 청혼을 합니다. 청혼을 하면서도 다이시는 오만한 태도를 유지합니다. 엘리자베스에게 끌리면서도 엘리자베스 집안이 자신의 집안에 비하면 보잘것없다는 사실과(이건 진실로 사실입니다), 엘리자베스의 어머니의 천박한 말품세 등은 참을 수가 없다는 말을 하면서 말입니다. 엘리자베스는 다이시의 청혼을 거절합니다. 그의 오만한 태도와 위컴에게 들었던 다이시의 간악한 처세 같은 것을 예로 들면서 그를 거절합니다.

청혼을 거절당한 다이시는 다음날 편지를 남깁니다. 빙리가 제인을 좋아했던 것은 사실이며, 자신이 빙리를 런던에 데리고 가서 롱본에 오는 것을 막았던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합니다. 단 자신이 보기에 빙리의 마음은 진실했으나, 제인의 마음은 깊지 않아서 친구 빙리의 행복한 결혼을 위해 막은 거라고 말합니다. 또 위컴에 대해서는 자신이 위컴에게 성직자 임명을 하지 않는 이유는 위컴이 방탕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으며, 무엇보다 일전에 성직자 자리를 포기하면서 큰 돈을 미리 줬음에도 그 돈마저 탕진하고 다시 한번 성직자 자리를 요구했기에 위컴을 상대하지 않는 진실은 알아달라고 편지에서 밝힙니다.

편지를 다 읽은 엘리자베스는 혼란스럽습니다. 오컴의 말을 믿어야 하나, 다이시의 말을 믿어야 하나. 하지만 냉정하게 그간의 정황을 모두 따져볼 때 다이시의 말이 신빙성이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그 동안 오컴의 말만을 믿고 다이시를 폄하하고 미워했던 자신이 수치스러워집니다. 소설 제목대로 편견이란 것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그 편견은 굳어지면서 급기야 오만한 태도로 까지 이어집니다. 절대로 내 생각이 틀릴 리 없다는 오만함 말입니다. 다이시가 청혼을 하면서 얼마나 수치스러웠을까, 생각하니 마음 한 켠이 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수치를 줬기에 다시는 그 시간(결혼의 기회)을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 엘리자베스의 외삼촌 부부가 다이시의 별장에 놀라갈 것을 권합니다. 다이시와 다시 마주치는 것이 무척 불편했기에 여러 차례 다이시가 여행으로 별장에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엘리자베스는 외삼촌 부부와 길을 떠납니다. 하지만 예정보다 하루 일찍 도착한 다이시와 엘리자베스는 조우하게 됩니다. 서로 무척이나 놀랐지만 다이시는 공손한 태도로 극진히 외삼촌 부부를 대접합니다. 그의 태도에 외삼촌 부부는 무척이나 흡족해 합니다. 엘리자베스와 다이시는 몇 마디를 나누지만 이렇다 할 진전 없이 돌아옵니다.

롱본에 돌아온 엘리자베스는 이제 다이시와 더 이상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은 하지만 은근한 기대를 계속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넷째 딸인 리디아가 위컴과 눈이 맞아 도망갔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베넷가의 위신이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엘리자베스는 다이시를 통해 알게 된 위컴의 실체를 미리 밝히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아버지 베넷이 런던에 가서 리디아를 찾지만 허탕을 치고 돌아옵니다. 절망하고 있는 베넷가에 외삼촌이 반가운 소식을 전합니다. 그들을 찾아냈고, 곧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는 소식입니다.

결혼식을 마치고 집에 잠시 들린 리디아는 다이시가 위컴과 자주 만났다는 말을 합니다. 비밀이라고 해서 더 이상 말할 수 없다고 돌아가지만, 엘리자베스는 외삼촌 부부를 통해 진상을 알게 됩니다. 다이시가 위컴에게 찾아가 위컴이 진 도박 빚을 모두 청산해주고, 결혼 후에도 생활이 가능하도록 일정 금액을 지원해주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엘리자베스는 다이시가 자신을 위해서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확신할 수 없는데다 원수와 같은 위컴과 가족관계로 얽힐 게 싫기 때문에 더욱이나 자신과의 결혼은 단 1%의 가능성도 없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후에 빙리가 롱본으로 돌아옵니다. 빙리는 제인에게 다시 청혼을 합니다. 얼마후 빙리와 함께 다이시가 롱본으로 옵니다. 엘리자베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이시에게 위컴과 자신의 동생 리디아에게 했던 다이시의 행동에 대해 말을 꺼내고 - 비밀로 부쳐야 하는데 우연찮게 알게 되었다는 말과 함께 - 감사하다는 인사를 합니다. 그제서야 다이시는 자신의 속마음을 밝힙니다. 그 모든 것은 실은 엘리자베스에 대한 자신의 사랑 때문에 했던 것이라고.

그리고 그 후로 행복하게 살았다.

이게 소설의 결말입니다.

2. 소설의 해석

로맨스 소설이지만, 사랑 또한 상대방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따라 향방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제대로 알려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엘리자베스와 다이시의 사랑은 소설을 읽다 보면 고구마를 먹어 체한 것처럼 너무 속도가 느립니다. 결국 이뤄질 듯싶으면서도, 설마 안 이어지나(저는 영화도 안 봤지만, 아예 대략적인 줄거리도 모르는 사람이라) 그게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오만과 편견의 제목대로 해석을 해 보자면, 엘리자베스는 다이시에 대한 자신의 편견, 그로 인해 생기는 오만으로 자신의 완벽한 짝을 처음부터 알아보지 못했고, 다이시는 애초에 자신이 지닌 오만한 태도, 그리고 엘리자베스 집안에 대한 편견(*사실 이건 편견이라기보다는 그 당시 사회적 관점이라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때문에 상대방에게 마음을 열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묻겠습니다. 제인 오스틴은 자신의 소설 "오만과 편견"을 통해 오만과 편견을 가지지 말자고 주장하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도 처음에는 - 적어도 소설을 막 덮고 난 바로 직후까지는 -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차피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편견은 가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본인이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서 말입니다.

엘리자베스와 다이시가 처음부터 아무런 편견 없이 상대를 대했다면 그렇게 애틋해질 수 있었을까요? 글쎄요. 제 대답은 부정적입니다. 자신이 가진 편견을 인정하고, 상대방의 생각을 수용하면서 서로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더 깊어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편견은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에, 되레 상대방 생각에 대한 열린 태도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소설 제목이 Prejudice and Pride가 아니라 Pride and prejudice인 이유는 오만이 있기에 그리고 편견이 따른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걸 더욱 경계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편견은 있지만 오만이 없다면 상대의 생각을 쉬이 수용할 수 있지만, 오만이 먼저 앞선다면 편견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습니다. 다이시의 경우 자신의 편견, 즉 자신에게 걸맞은 집안과 결혼해야 한다는 편견을 단단히 지키고 서 있는 오만을 깨뜨린 것이 바로 엘리자베스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결국에는 가장 큰 힘은 사랑이네요. 디즈니 영화도 아닌데 결론이 같아 버리네요.

0. 나오면서

어찌됐든 셰익스피어에 이어 2위에 오른 제인 오스틴. 그녀가 2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아마 탁월한 심리 묘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사건의 전개는 누구나 쓸 수 있지만, 심리묘사는 아무나 슬 수 없다.

감히 단언해 봅니다. 어쩌면 도스토예프스키가 그 만연체에도 불구하고, 톨스토이가 그의 소설 깊이 흐르는 기독교 세계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최고의 소설로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손꼽히는 이유가 그들의 탁월한 심리 묘사 탓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인 오스틴의 다음 소설을 고르기가 힘듭니다. 이성과 감성을 읽을지, 에마를 읽을지 아직 결정 내리지 못했습니다. (*참고로 에마가 무진장 두껍네요(웃음))

읽을 책들이 너무 많아 부담스러우면서도 행복한 비명을 질러보는 하루입니다.

그럼 행복한 독서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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