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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독서] 장례의 역사 - 박태호
[직장인 독서] 장례의 역사 - 박태호
(장례의 역사) 고인돌부터 납골당까지, 숭배와 기피의 역사
대학교 3학년 겨울 즈음 계절학기로 '종교와 영화'라는 수업을 들었습니다. 5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서 뒤돌아볼 때, 세부적인 내용보다도 기억에 남는 이슈가 하나 있습니다. 무교(巫)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바로 죽음의 절차를 짚어주셨던 것입니다. 강의자료를 기억해보면 염과 습, 문지방 등 키워드들이 생각나는데 유독 제 머릿속에 맴돌던 것이 하나 있었어요. 바로, 지붕 위에 올라가 망자의 생전에 입던 옷을 하늘에 대고 흔들던 것이었습니다. 그게 무엇이었을지, 무교로써 종교적인 절차였는지 궁금했습니다. 찾아보니 고복(皐復)으로 망자의 영혼이 돌아오길 바라는 우리의 전통 장례 절차였지요. 그렇게 장례에 대한 관심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장례의 특징과 발전이 담긴 역사를 한번 짚어보고 싶었거든요.
엥? 그런데 강사님 소속이 종교학과에서 치의학과로 바뀌셨다. 응원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들었던 것은 올 7월 무렵이었을 겁니다. 습관처럼 교보문고 어플을 켜고, 장례라는 키워드를 검색한 뒤 장례의 역사를 포함하여 읽고 싶던 책들을 장바구니에 담아두었어요. 그렇게 시간이 흘러 9월 말, 집 근처 도서관에서 책을 살펴보다가 우연히 장바구니에 담아둔 이 책을 발견했고 홀린 듯이 빌리게 되었습니다.
성동구립도서관에는 꽤 신기한 책이 많습니다.
책은 굉장히 작습니다. 양옆으로 펼쳐도 A4 크기가 아닌 것으로 보아 B5 정도 되지 않을까 추측합니다. 200쪽 내외이지만, 전통과 의례를 다룬 책들의 특성이 그러하듯이 생소한 용어와 한자가 많이 출현해서 빠르게 읽히지만은 않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고려시대 이전의 무덤양식은 다소 추상적인 기분이 들어서 편하게 읽으며 이해 안 되는 부분은 스킵을 했던 것 같아요.
장례문화에 대해 간단히 서술한 뒤, 선사 시대부터 원삼국, 통일신라, 고려와 조선, 일제, 그리고 현대까지 장례와 관련한 모든 역사를 아우릅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무덤과 장법의 역사라고 보아도 무방해 보입니다. 아래는 책을 읽으며 새로 배웠거나 신기했던 점을 기록한 것입니다 :)
(1) 장례문화란 무엇인가?
죽음과 관련한 의례 거나 그 일
사례편람(四禮便覽)을 참고한 우리의 전통 장례 절차 : (한자 생략) 초종, 습, 소렴, 대렴, 성복, 조상, 문상, 치장, 천구, 발인, 급묘, 반곡, 우제, 졸곡, 부제, 소상, 대상, 담제, 길제 등 여러 단계의 까다롭고 긴 절차를 가지고 있으며, 제각기 엄격한 격식은 물론 일정한 의미를 담고 있음
무덤의 기능(과거) : (1) 지하에 저승이 있다는 신앙, (2) 사자(死者)를 겁내기 때문에 관계를 끊기 위하여, (3) 움집 생활의 유풍, (4) 위생적인 측면, (5) 이곳에 주검을 묻어두었다는 표지를 남기기 위해, (6) 시체 보존하여 훗날 신앙적인 필요성에 의해, (7) 기념 또는 과시용, (8) 죽은 자의 영험한 힘을 받아 후손들이 발복 하고자 하는 염원 .
→ (의견) 고려 말기를 거쳐 유교 및 성리학의 도입으로는 (8)의 기능이 가장 크지 않을지?
. → (의견) 고려 말기를 거쳐 유교 및 성리학의 도입으로는 (8)의 기능이 가장 크지 않을지? 흙에 시체를 매장 : 흙은 재생의 기원이기 때문
우리는 오랜 옛날에는 주검을 땅에 묻지 않고 들에다 버려두었는데, 사람들의 인지가 점차 발달하면서 매장하는 방법이 생겨났음
(2) 선사시대, 모든 장법이 시작되다.
죽은 자가 숭배만 받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죽은 자가 산 자를 해코지 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음 : 영혼이 떠돌아다니지 못하도록 돌무지로 덮어두거나, 달구질을 하여 귀신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함
: 영혼이 떠돌아다니지 못하도록 돌무지로 덮어두거나, 달구질을 하여 귀신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함 세골장 : 주검을 한동안 묻지 않고 보관한 후, 쉽게 부패하는 육체와 장기 등이 부패한 뒤에 남은 뼈를 깨끗이 씻어서 관이나 용기에 담아 다시 장사를 지냄 → 우리나라 서해안과 섬 지역에 흔적이 일부 남아있음
: 주검을 한동안 묻지 않고 보관한 후, 쉽게 부패하는 육체와 장기 등이 부패한 뒤에 남은 뼈를 깨끗이 씻어서 관이나 용기에 담아 다시 장사를 지냄 → 우리나라 서해안과 섬 지역에 흔적이 일부 남아있음 돌을 사용한 무덤 : 당시 사회를 지배하던 사람들의 무덤으로서 권력과 권위를 나타냄
(3) 원삼국과 삼국 시대, 장대한 고분문화가 성행하다.
한나라의 무덤 문화를 들여온 낙랑 : 기원전 194~180년 고조선과 교체된 위만조선은 중국 한나라 무제의 공격과 내분으로 기원전 108년에 멸망. 그 후, 한나라는 위만조선 영토에 4군(대동강 유역에 자리 잡은 낙랑)을 설치하여 통치.
이 시기 고분들은 크게 나무덧널무덤과 벽돌무덤 두 형식으로 이루어짐
나무덧널무덤 벽돌무덤
나무덧널무덤의 목관에는 보통 부부 두 사람의 시신이 들어가며, 침향은 북침이고 남자는 서쪽에, 여자는 동쪽을 차지한다. 목관 안의 시신은 명주로 여러 겹 감겨 있고 두 손에는 옥돈이 쥐어져 있으며, 아홉 구멍에는 옥으로 만든 마개가, 입에는 생명의 부활을 상징하는 매미처럼 생긴 구슬로 반함(망자의 입에 구슬과 쌀을 물림)을 하였음
고대의 우리 조상들의 장례식은 이승의 삶을 마감한 고인의 영혼이 무사히 저승 세계에 도착하고 언젠가 다시 새 생명으로 부활하기를 기원하는 자리 였다.
였다. 옥저와 예맥 의 경우, 죽은 자의 새로운 삶을 위해 나무덧널 안에 쌀을 담은 옹기솥을 매달아 둠
의 경우, 죽은 자의 새로운 삶을 위해 나무덧널 안에 쌀을 담은 옹기솥을 매달아 둠 예맥 의 경우, 사람이 죽으면 그 집을 헐고 새로 집을 지음. 이는 동굴에서 살다 가족이 죽으면 그곳에 묻고 다른 곳으로 옮긴 선사 시대의 생활 모습을 담고 있음
의 경우, 사람이 죽으면 그 집을 헐고 새로 집을 지음. 이는 동굴에서 살다 가족이 죽으면 그곳에 묻고 다른 곳으로 옮긴 선사 시대의 생활 모습을 담고 있음 삼한의 경우, 죽은 사람의 영혼이 하늘나라로 날아갈 수 있도록 큰 새의 깃털을 장례에 사용
삼한은 솟대부터 새를 참 좋아하는 것 같다. (사진출처 : 위키백과)
★ 고대사회에서 무덤은 한 생명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가 새 생명으로 탄생하기를 기다리는 죽은 자의 거주 공간이었다고 볼 수 있음
외래사상의 전래( 유교 ) : 유교와 함께 중국의 장례문화로 삼년상과 상복제와 중국 무덤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흙으로 봉분을 만드는 무덤이 유행
) : 유교와 함께 중국의 장례문화로 삼년상과 상복제와 중국 무덤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흙으로 봉분을 만드는 무덤이 유행 외래사상의 전래(불교) : 삼국 각 나라의 왕실이 불교를 수용하며 불교의 '윤회사상'과, 죽은 자가 환생하는 것은 살아생전의 공덕에 좌우되는 '공수래공수거'라는 가르침은 사후세계 관념에 큰 변화를 초래
(4) 통일신라와 발해, 불교식 장례가 전개되다.
통일신라, 전통과 외래문화의 뒤섞임 : 유학을 지도 이념으로 하던 사회에서는 시신 매장을 원칙으로 하고, 화장이나 풍장 등은 야만시하여 예법으로 금하여 왔음 . 삼국사기에서는 '화장'이라는 표현을 피하고 '관을 불사르다'와 같이 표현하였고, 삼국유사에서는 '화장'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왜냐... 삼국유사는 스님(불교)이 편찬하였기 때문
. 삼국사기에서는 '화장'이라는 표현을 피하고 '관을 불사르다'와 같이 표현하였고, 삼국유사에서는 '화장'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왜냐... 삼국유사는 스님(불교)이 편찬하였기 때문 화장은 신석기시대 이래 전통적인 지배층의 장법이어서 큰 거부감이 없었음. 또한, 화장은 힘없는 민중이 쉽게 사용할 수 없는 고비용의 장법이었다.
장례법의 다양성 : 결국 불교가 성행한 이 시대에 왕이나 귀족, 그리고 승려들은 대개 화장을 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믿음이나 경제력 등에 따라 다른 장법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 당연히 민중의 경우도 이런 경향을 벗어나지 않았으며, 이러한 통일신라의 장례법은 전통과 외래문화가 혼재된 가운데 다양성을 자랑하였으며, 이런 경향은 고려 시대로 그대로 이어지게 됨.
. 당연히 민중의 경우도 이런 경향을 벗어나지 않았으며, 이러한 통일신라의 장례법은 전통과 외래문화가 혼재된 가운데 다양성을 자랑하였으며, 이런 경향은 고려 시대로 그대로 이어지게 됨. 발해, 고구려와 말갈족, 당나라 :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연합하여 세운 발해 건국 초기에는 고구려와 말갈족의 장법을 함께 사용하였음. 이후 발해 사회가 강성해지면서 당나라의 장례방식을 본받아 발해 특유의 무덤 탑과 능원 등을 조성(정효공주의 무덤 예)
발해,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하다 : 발해 초기에는 돈화시 육정산 고분군처럼 화장도 유행하였다. 시신을 관에 넣은 후 무덤 안에서 불에 태우는 방식인데, 발해 중기 이후에 점차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발해의 화장도 고구려의 전통을 이었다고 보는 게 무리가 없다.
(5) 고려 시대(I), 다양한 장례문화를 선보이다.
고려 전기, 장례 절차의 대부분과 화장을 절(卍)에서 진행 : 불교에 귀의하면 출가하여 부모를 떠나야 하는데, 이는 유교에서 인륜을 저버리는 행위라고 매도하였음. 이러한 비판에 직면한 불가는 그 대안으로 장례와 제사를 절 안에 받아들이기로 하였음.
불교에서는 이를 '다비'라고 부릅니다.
유교가 확산되는 12세기, 절에서 사망하거나 화장하는 경우가 점차 줄어들게 됨(공민왕의 예)
고려사, '공후 이하는 3일이 되면 장례 한다'라고 서술 :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3일이 지나야 장례를 치르는데, (1) 죽음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할 수 없었고, (2) 남은 가족 입장에서 다시 살아날지 모른다는 간절한 소망을 담았고, (3) 현실적으로 장례에 필요한 물품이나 장소를 마련하고 먼 곳의 친척에게도 알리는 준비 기간이 필요했기 때문.
(6) 고려 시대(II), 전통 장례가 태동하다.
고려 시대의 장법은 대체로 통일신라 시대로부터 이어져 온 것들로, 시대가 비교적 오래지 않아 무덤 유구나 유물로 전해지는 것이 많은 편
무덤의 유형(겉모양) : 둥근 원형(왕릉과 귀족층의 돌방무덤)과 네모진 방형(양민들의 무덤)
※ 고려 후기 권문세가의 무덤 중에서는 방형 무덤도 적지 않다.
경주시 구정동 방형분(통일신라 시기), 네모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무덤의 유형(사용 계층) : 왕릉과 귀족층의 돌방무덤, 일반 양민들의 민묘
무덤의 유형(내부 구조 및 재료) : 돌방 무덤, 돌널무덤, 돌덧널무덤 등
화장무덤의 보급 : 절 근처의 산기슭이나 산등성이 등에서 화장이 진행되었음
화장이 끝난 유골을 임시로 안치하고 제를 올리는 것을 '권안(權安)'이라고 함
(7) 조선 시대(I), 유교적인 장례문화가 발전하다.
초기와 중기 장례문화의 특징 : 주자가례에 의한 유교적인 상장례 문화 정착, 불교의 장법인 화장이 금지 되고 돌방무덤에서 회격 무덤으로 전환을 맞게 됨. 국영 장의사인 귀후서의 설치 도 이 시기.
장례문화의 특징 : 되고 돌방무덤에서 회격 무덤으로 전환을 맞게 됨. 국영 장의사인 도 이 시기. 후기 의 장례문화의 특징 : 묘비의 사용이 확산, 문중 단위의 집단 묘지, 풍수지리설 팽배에 따른 명당자리를 다투는 산송 발생
의 장례문화의 특징 : 묘비의 사용이 확산, 문중 단위의 집단 묘지, 어떻게 화장을 근절시킬 것인가? : 고려 왕조 마지막 왕인 공양왕부터 시작, 조선 태조도 논의, 세종 대 사헌부에서 건의하였으나 효과가 미미. 성종 1년에 강력한 조치(중죄 부과), 그 후 100년이 더 지난 선조실록에서도 화장은 나타남. 즉, 조선 전기 사회에서는 아직 화장이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음.
관곽에서의 특징 : 삼국 시대에는 관의 결구로 쇠못과 금은으로 치장한 못을 사용, 고려 시대와 조선 초기까지도 쇠못을 사용하였으나 조선 중기부터 쇠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비장으로 관재를 결구. 이는 현재까지도 이어진다.
조선 시대에는 수의보다 습의라는 말이 더 많이 사용 : 습의는 시신에게 입히는 옷, 염의는 시신을 싸는 옷
지금과 같이 삼베를 많이 이용하는 경향은 적어도 1910년대 이후, 일제의 경제 수탈로 전통 복식을 갖추기 어려웠을 것임.
(8) 조선 시대(II), 전통적인 무덤 문화가 완결되다.
무덤의 계급, 능/원/묘 :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 원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왕을 생산한 후궁의 무덤, 묘는 능과 원에 해당되지 않는 사대부와 일반 서민의 무덤
묘비에 대하여 : 중국 후한 말 조조는 묘비의 건립을 중지시켰고 그 영향으로 고려 시대까지 묘비 흔적이 많지 않았으나, 고려 후기에 성리학이 들어오며 다시 묘비를 세우기 시작하였음
17세기 예송 논쟁(율곡학파 서인과 퇴계학파 남인의 대립)에 대해 : 효종과 효종비 승하 후, 인조의 계비이던 자의대비의 복상 기간을 어떻게 할 것인지, 그리고 효종비 인선왕후 사후 자의대비의 복상 기간을 어떻게 할지에 대한 첨예한 대립
예송 논쟁이 장례 역사에 끼친 영향 : 이후 조선의 장례문화는 고대로부터 전해지는 다양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획일적인 풍습이 자리 잡고 강한 배타성을 지니게 되어 산송에도 영향을 미치게 됨
저는 아래, 유교가 종교로서 지닌 문제점과 이로써 야기된 장례문화가 굉장히 와닿았습니다.
종교의 측면에서 유교(1) : 불교와 달리 유교는 신앙이라는 측면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는 절대 신이 존재하지 않고 신에 의지한 자기구복 체제와 사후의 내세신앙이 없었다. 또한, 죽은 조상에 대한 보본(은혜를 갚음) 사상은 있어도 살아있는 자를 위한 기양(복은 들어오고 재앙은 물러가라고 신명에게 비는 일) 체계는 없었다.
종교의 측면에서 유교(2) : 여기서 절대 신격을 대신한 것이 전통적인 조상 신앙이었고, 자기구복 체계를 받쳐준 것은 산악신앙과 결합한 풍수지리였다. 신앙의 목표에는 다분히 현세적 열망이 강렬히 작용하는데, '누구는 묘를 잘 써서 부귀영화를 누렸고, 누구누구는 묘를 잘못 써 패가망신하였다.'라는 풍수설화가 난무하게 되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풍수신앙이 극성을 부리게 되어 산송이 빈발하게 되었다.
종교의 측면에서 유교(3) : 국가는 백성들의 의례를 통제함으로써 영적 세계를 지배하고 유교적 사회 질서를 확립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역효과를 보게 되었다.
조선 후기, 산송의 격화 : 상업의 발달로 양반 수가 증가하고 노비가 감소하는 등 신분 질서가 와해되었음. 양민들 사이에도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려는 욕구가 높아졌고, 풍수설과 결합하여 명당에 대한 욕구가 증대하였기 때문.
권선징악 등 민담과 전설 : 기독교의 천국과 지옥, 불교의 극락과 연옥과 다르게 유교 사회였던 우리의 민담 속에는 곧잘 한 맺힌 원혼과 무덤이 단골로 등장하게 됨
(9) 일제 강점기, 이질적인 장례문화와 만나다.
대한제국 끝 무렵, 화장의 재도입 : 1902년 5월 10일, 일본인의 화장로 도입과 수백 년 간 깊게 뿌리내린 유교의식과 충돌하였음. 조선총독부는 '건전한 장례'라는 명분을 내세워, 우리 전통적인 장례 풍습을 대폭 간소화시킨 '의례 준칙'을 제정하고 강제 하였음
하였음 근대적인 장묘제도의 도입 : 1912년 6월, 조선총독부에서는 풍수사상에 근거를 둔 미신을 타파하고 분묘의 위생적인 관리와 경관 보호 등을 이유로 '묘지 화장장 매장 및 화장 취체규칙(조선총독부령 제123호)'을 발포하였음
묘지 화장장 매장 및 화장 취체규칙(조선총독부령 제123호) : 공동묘지와 화장장의 설치 허가, 시설 주변 나무 식재 의무화, 화장장의 위생 관리, 사후 24시간 이내 매장 및 화장 금지, 풍장 및 유기장 금지(20세기 초까지 이러한 풍습이 이어져오고 있었다는 사실!) 등
취체규칙 개정 : 1919년, 3·1 운동이라는 우리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자 문화 정치라는 명분으로 개정안 내놓음.
의례 준칙 강권 : 1934년, 성복의 절차를 생략하고 염습이 끝나면 바로 상복을 입도록 하였음. 우리 전통의 굴건제복이 아닌, 두루마기에 통두건 혹은 양복에 완장을 강권 등 우리 한국 문화적 전통을 무시. 자동차를 운구에 사용해도 무방하다는 점이 있는데, 이는 전통적인 상여 행렬을 억제하려는 의도.
우리 전통의 굴건제복
(10) 현대, 장례문화가 산업화되다.
장묘 정책을 다룰 여력이 없었음 : 현대에 이르러 해방과 한국전쟁, 4·19 혁명과 5·16 군사쿠데타 등 사회 혼란과 급속한 경제개발 과정. 1960년대에는 높은 유아, 젊은이 사망률로 서울의 화장률이 50%에 육박하였음
법률 공포 : 1961년, '매장 및 묘지 등에 관한 법률'을 시작으로 1973년, '가정의례에 관한 법률' 등이 공포되었고 1980년대 말부터 묘지를 구하기 어려워짐에 따라 화장이 증가하여 납골문화라는 다소 이질적인 문화가 등장
일부 조항의 사문화 : '허가된 묘지 이외에 매장을 금지'하도록 명시되었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음. 2001년, '장사 등에 관한 법률'에서 신고제로 바뀌었으나 지금도 잘 지켜지지 않음.
가정의례를 법률로 통제 : 1934년 일제의 '의례 준칙'과 박정희 정부의 '가정의례준칙'의 공통점은 국력을 모으기 위함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현대에 이르면서 : 급격한 도시화 과정에서 마을 공동체가 해체되고 핵가족화. 아파트라는 새로운 주거문화에 따른 가정에서의 장례문화는 다소 부적합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음
의료 산업의 발전 : 과거에는 말기 환자들을 '집으로 모시고 가 편안하게 보내드립시오'라며 권해왔지만, 현대에 이르며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하고 부속된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르게 됨
장례는 인간사에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 일반 역사와 마찬가지로 장례 또한 큼직한 사건(외래문화의 도입, 종교의 수용 등)을 만날 때마다 분기해나갔습니다. 고조선의 멸망과 한사군의 설치로 중국문화의 도입, 뒤이어 불교와 유교의 도입, 성리학의 도입, 예송 논쟁, 신분제 약화, 일제 치하 등 사건마다 장례의 역사는 꽤 가시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장례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역사를 한번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싶을 때, 일주일 정도 여유를 두고 천천히 읽어보시면 꽤 재밌게 읽어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유교의 영향이 굉장히, 기대보다도 훨씬 크게 장례에 영향을 미친 점이 가장 신기했습니다. 저자는 조선 후기를 다루며 유교의 종교적인 측면에서의 문제점을 언급하시며, 예송 논쟁과 산송을 자연스럽게 풀어나가셨어요. 매끄럽고 읽는 내내 흥미로웠습니다.
전통 장례절차의 의미에 대한 서술은 비교적 적었습니다. 처음에 장례에 관심을 갖게 된 고복을 포함한 전통 장례절차의 세부적인 목적과 의도는 아쉽게 읽지 못했습니다. 직접 검색해보니 사잣밥을 3개 차린다고 하는데, 생각해보니 주호민 작가님의 '신과 함께'에서도 사자는 세명이었잖아요? 궁금합니다. 찾아서 읽어봐야겠네요 :)
장례의 역사(박태호) 독후감 / 줄거리 / 서평
2021년 10월 11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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