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바꾼 21인의 위험한 뇌

세계사를 바꾼 21인의 위험한 뇌

고나가야 마사아키 지음 / 사람과나무사이

영웅과 리더의 뇌에 침투한 질병이 세계사의 흐름과 판도를 바꿔놓았다고?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

이다.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랜트 장군. ‘무자비한 학살자’라는 별명으로 불린 그는 모두의 예

상을 깨고 패배한 남군 장병들에게 매우 관대한 처분을 내려 더 큰 분열을 막고 초강대국 미국의

기틀을 다졌다. 한데 이 역사적 결단이 그의 ‘편두통’ 덕분이었다는데…?! 이 책에는 측두엽뇌전증,

뇌하수체 종양, 편두통, 파킨슨병 등의 질환이 막시미누스 트락스, 잔 다르크, 도스토옙스키, 링컨,

그랜트, 프랭클린 루스벨트, 히틀러, 마오쩌둥 등 역사적 인물 21명의 뇌에 침투하여 중요한 순간

에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하게 함으로써 세계사를 바꾼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세계사를 바꾼 21인의 위험한 뇌

고나가야 마사아키 지음

▣ 저자 고나가야 마사아키

1949년 지바현에서 태어나 나고야대학교 대학원 의학 연구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고 신경내과학을 전

공했다. 현재 일본 국립병원기구 스즈카 병원의 명예 원장으로 있으며 파킨슨증과 ALSㆍ근이영양증

등의 신경 관련 난치병을 진단하고 치료한다. 의학박사, 뇌신경내과 전문의, 일본 치매학회 전문의, 일

본 내과학회 인정의로도 열정적으로 활동한다. 저서로는『의학 탐정의 역사 사건부』

『히틀러의 떠는 손,

마오쩌둥의 저는 다리』『로마 교황 검시록』『난치병에 도전하는 유전자 치료』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오늘날 미국이 세계 최강대국이 된 배경에는 한 전쟁 영웅을 괴롭힌 질병 ‘편두통’이 있었다. 그 주인

공은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북군 총사령관 율리시스 심프슨 그랜트 장군이다.

60만 명의 사망자를 내며 4년간 전개된 남북전쟁은 압도적 화력에 힘입은 북군의 승리로 끝났다. 남군

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은 그랜트 장군에게 사자를 보내 항복의 뜻을 전하면서 상당한 대가를 치를 것

을 각오했다. 그랜트가 ‘무자비한 학살자’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냉혹한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그

러나 뜻밖에도 그랜트 장군은 “전쟁은 끝났소. 반란군이 다시 우리 국민으로 돌아왔소”라고 말하며 남

군 장병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식량까지 제공해주었다. 이것은 당시에는 몰랐으나

미국사와 세계사의 물줄기를 획기적으로 바꾸는 결정이었다. 그랜트 장군의 관대한 처분이 남부와 북

부의 더 큰 분열을 막고 하나의 국가로 거듭나게 함으로써 훗날 초강대국 미국의 기틀을 다지는 데 결

정적으로 기여했기 때문이다.

그랜트 장군이 남군 장병들에게 그토록 관대한 처분을 내린 이유는 뭘까? 그것은 바로 그를 오랫동안

괴롭혀온 편두통의 영향이 컸다. 마지막 격전 중에도 그는 극심한 두통에 시달렸으나 리 장군의 사자

가 도착했을 때 기적적으로 두통이 사라졌다. 이 예기치 않은 상황이 그의 심경에 변화를 일으켰고,

이튿날 회담장에서 리 장군을 만나 뜻밖의 관대한 처분을 내린 것이다. 한 전쟁 영웅을 괴롭힌 뇌질환

이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순간이었다!

이뿐만 아니다. 만일 ‘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치매로 인해 판단력과 분별력을

상실하지 않았다면 광기에 사로잡힌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는 등장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600만 명의 유대인 학살사건도, 제2차 세계대전의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독일제국이 자랑하는 전쟁 영웅이었던 힌덴부르크 장군은 대통령이 된 후 왜 그토록 무능해져 결국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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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21인의 위험한 뇌

라를 망치고 세계사에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남겼을까? 그가 판단력과 책임감을 상실하여 중차대한 국

가적 사안에 어리석은 결정을 반복하고, 마침내 히틀러에게 권력을 송두리째 넘기게 된 배경에는 뇌질

환 치매가 있었다.

이 책에는 이처럼 뇌하수체 종양의 영향으로 로마제국을 멸망 위기로 몰고 간 거인 황제 막시미누스

트락스 이야기,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를 구해낸 잔 다르크의 영웅적 행동이 그의 뇌를 지배한 측두엽

뇌전증 때문이라는 이야기, 영국 해군제독 더들리 파운드가 뇌종양으로 인한 치명적 오판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을 패전으로 이끌 뻔한 이야기 등 역사적 인물 21명의 뇌에 침투하여 중요한 순

간에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하게 하여 세계사를 바꾼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빼곡하다.

▣ 차례

서문_영웅과 리더의 뇌에 침투한 질병이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꾸다

Part 1_ 무서운 질병이 영웅과 군주의 뇌를 조종하여 세계사를 뒤흔들어놓다

1. 잔 다르크와 도스토옙스키의 뇌를 지배하여 세계사와 세계 문학사를 바꾸다 - 측두엽 간질

2. 로마 황제를 파멸시키고 로마제국을 멸망으로 몰고 간 끔찍한 질병 - 하수체성거인증ㆍ말단비대증

3. 클레오파트라는 왜 ‘맹독성 코브라’를 자살 도구로 사용했을까 - 코브라 독ㆍ중증 근무력증

Part 2_ 강대국 리더들이 결정적 오판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놓게 한 치명적 뇌 질환

4. 그랜트 장군의 뇌에 침투하여 남북전쟁의 흐름을 바꾸고 미국사와 세계사의 판도를 바꾼 질병 - 편

두통

5. 바이마르공화국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히틀러의 꼭두각시로 만들어 세계대전을 촉발한 질병 - 치매

6. 영국 해군 제독 더들리 파운드의 뇌를 장악한 질병, 치명적인 오판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판도를

바꾸어놓을 뻔하다 - 뇌종양

7. 미국의 ‘4선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최악의 대통령으로 만든 질병 - 고혈압성 뇌출혈

8. 히틀러의 장기 집권과 나치스 독일의 세계 지배를 막은 질병 - 파킨슨병

9. 인민의 영웅 마오쩌둥을 바보로 만들고 중국 공산당을 추악한 권력투쟁의 복마전으로 만든 질병 근위축성 측삭 경화증(루게릭병)

10. 최고 지도자 브레즈네프의 지능을 저하시켜 소련 붕괴의 방아쇠를 당긴 질병 - 뇌혈관성 치매

Part 3_ 넘사벽 천재와 최고의 대가도 무릎 꿇게 한 끔찍한 질병

11. 위대한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를 마지막까지 괴롭힌 적수 - 펀치드렁크 증후군

12. 시인 보들레르와 암흑가의 제왕 알 카포네를 파멸시킨 질병 - 매독

13. 밥 딜런의 ‘마지막 영웅’ 우디 거스리의 인생을 망가뜨린 질병 - 헌팅턴병

14. 마릴린 먼로의 롤모델이었던 전설적인 섹시 여배우를 몰락으로 이끈 질병 - 알츠하이머 증후군

15. 잠들면 숨이 멎는 ‘운디네의 저주’ - 수면 무호흡 증후군

16. 전설의 골퍼 바비 존스의 승승장구 질주에 급브레이크를 건 질병 - 척수 공동증

17. 페라리사 창업자의 촉망받는 후계자를 요절하게 한 질병 - 근위축증

후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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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21인의 위험한 뇌

세계사를 바꾼 21인의 위험한 뇌

고나가야 마사아키 지음

Part 1_ 무서운 질병이 영웅과 군주의 뇌를 조종하여 세계사를 뒤흔들어 놓다

클레오파트라는 왜 ‘맹독성 코브라’를 자살 도구로 사용했을까 - 코브라 독ㆍ중증근무력증

고대 이집트 왕국 최후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과연 절세 미녀였을까?: 아름다운 외모를 무기로 치열

하게 살았던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

렸을 때 고통의 흔적 없이 아름다운 얼굴로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다. 그녀는 어떤 비책을 써서 죽음에

이르렀을까? 그리고 그녀의 죽음은 당대 로마제국과 이집트, 그리고 주변 국가들의 정세 및 역학 관계

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고대 이집트 왕국은 기원전 3,000년경부터 나일강 주변에서 번성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이집트 땅에 새로운 왕조가 세워졌다. 기원전 304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하 중 한 명인 그

리스계 마케도니아인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300여 년의 찬

란한 영광을 뒤로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한 인물이 바로 클레오파트라 7세다. 클레오파트라는 그

리스어로 ‘아버지의 영광’이라는 뜻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공주에게는 흔한 이름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그녀가 살았던 당시 만들어진 동전에 부조가 남아 있어 실제 외모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한데 오늘날 잣대로 보자면 매부리코에 딱히 미인이라고 하기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아름다움

에 관한 판단과 평가는 시대마다 다르다. 어쨌든 그녀가 당대 최고 영웅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매

혹시킨 점으로 볼 때 단지 이목구비의 수려함을 뛰어넘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선물용 카펫으로 자기 몸을 말아 카이사르의 거처에 잠입하는 클레오파트라: 기원전 51년, 열일곱 살

클레오파트라는 왕조의 관습에 따라 당시 아홉 살이던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하며 공동

통치자인 여왕의 자리에 올랐다. 고대 이집트 왕가에서는 근친혼이 흔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 부부

사이는 냉랭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른 형제들까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면서 집안 문제로 번져

시끌시끌해졌다. 그 와중에 클레오파트라는 고립무원의 신세가 되었다.

그 무렵 로마에서 카이사르가 숙적 폼페이우스를 축출하고 이집트로 와서 수도 알렉산드리아의 왕궁을

거처로 정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를 자기편으로 만들고자 애정 공세를 펼치며 승부수를 던졌다.

그는 이집트 왕인 남동생의 호위병에게 들키지 않도록 선물용 카펫으로 자기 몸을 둘둘 감아 카이사르

의 거처에 몰래 잠입했다. 카이사르는 독특한 매력을 지닌 미녀 클레오파트라에게 푹 빠졌고 왕권을

둘러싼 부부 싸움에 개입하여 그녀에게 군사적ㆍ정치적으로 힘을 실어주었다. 이후 클레오파트라와 카

이사르는 달콤한 동거 생활을 시작했고 두 사람 사이에 아들 카이사리온이 태어났다.

그로부터 얼마 후인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원로원에서 공화파인 브루투스 일당에 의해 암살당하고

만다. 클레오파트라는 황망히 이집트로 돌아와야만 했다. 우여곡절 끝에 암살자들을 처리하고 패권을

잡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에 입성했다. 야심가였던 클레오파트라는 새로운 로마 총사령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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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21인의 위험한 뇌

이집트 왕국의 공동 통치자로 만들어 다시 달콤한 밀월을 시작했고 세 아이를 얻었다. 두 사람은 향락

에 빠진 생활을 즐기는 한편 로마와 거리를 두고 독립을 꿈꾸기 시작했다. 위기감을 느낀 로마는 카이

사르의 의붓아들인 옥타비아누스를 사령관으로 삼아 토벌군을 파견했다.

옥타비아누스마저 클레오파트라의 유혹에 넘어갔다면 세계사의 물줄기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기원전

31년 그리스의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함대는 옥타비아누스의 로마 해군에 대

패하고 말았다. 최후의 결전에서 패배한 안토니우스는 단검으로 자신을 찔러 클레오파트라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한때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매료시켜 사랑의 포로로 만들었던 클레오파트라는 옥타

비아누스와 평화 교섭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만약 클레오파트라가 옥타비아누스의 마음마저

사로잡았다면 이후 역사의 물줄기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각오한 클레오파트라는 다양한 독약의 효능을 시험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떤 독이 고통

없이 그리고 아름다운 얼굴을 유지한 채 생을 마감하게 해줄 수 있을지 사형수나 노예를 대상으로 인

체 실험을 거듭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이 세운 영묘 안에 틀어박혔고 그 주위를 로마군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어느 날 탐스러운 무화과를 가득 담은 광주리가 밖에서 들어왔다. 광주리를 받아든 클

레오파트라는 안에서 독사를 꺼내 자기 가슴을 물게 했다. 로마군이 부랴부랴 영묘에 들어왔을 때 클

레오파트라는 마치 잠든 듯한 표정으로 황금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그렇게 파란만장

한 서른아홉 해를 살다가 갔다.

클레오파트라가 자살 도구로 ‘맹독성 코브라’를 선택한 이유: 뱀독은 뱀에 물린 동물의 출혈이 멈추지

않게 하는 ‘출혈독’과 신경이 내린 지령이 근육에 전달되지 않게 하는 ‘신경독’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살모사와 방울뱀과 같은 맹독성 뱀이 지닌 독은 출혈독이다. 반면 얼핏 보면 잠자는 듯 편안한 죽음을

맞게 해주는 독은 신경독으로, 주로 코브라나 바다뱀의 독이다.

뇌와 척수에서 나온 신경은 근육과 만나는 곳에서 아세틸콜린이라는 물질을 분비하여 근육에 지령을

전달한다. 신경종말에서 나온 아세틸콜린이 근육 표면에 있는 수용체, 즉 전기 코드에 비유하자면 플

러그의 소켓에 해당하는 콘센트 부분에 연결되면 근육이 반응해 수축한다. 이 소켓을 신경접합부라고

부르는데, 코브라와 같은 신경독은 콘센트 부분을 차단하여 아세틸콜린이 올바른 지령을 전달하지 못

하게 한다. 코브라에 물린 사람이 꿈꾸는 듯 몽롱한 표정을 짓다가 손발이 마비되고 호흡 곤란을 겪다

가 사망하게 되는 것은 그런 연유에서다. 실제로 코브라에 물렸다가 가까스로 살아난 사람들은 속이

울렁거리고 극심한 통증과 호흡 곤란으로 고통스러운데, 근육이 마비되어 어떤 표정도 지을 수 없고,

말도 할 수 없고, 몸부림칠 수도 없어 죽을 만큼 괴롭고 답답했다고 한다.

사람이 코브라에 물리면 즉시 눈꺼풀 등의 얼굴 근육에 이상이 생겨 몽롱하게 졸린 듯한 표정을 짓게

된다. 클레오파트라의 시신을 본 사람들이 그가 편안하게 잠자듯 저세상으로 갔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런 이유에서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방울뱀 등의 독에는 마약과 같은 작용을 하는 오피오이디 펩타이

드 성분이 들어 있다고 하니 어쩌면 클레오파트라의 몸속으로 코브라의 독이 들어갈 때 고통을 덜 느

끼게 해주는 물질이 함께 흘러들어갔을 수도 있다.

우리 몸의 모든 움직임을 먹잇감으로 삼는 중증 근무력증: 뱀독이 아니라 질병으로 아세틸콜린 수용체

가 망가지는 질환이 있는데, 바로 중증근무력증이다. ‘자, 근육을 움직여’라고 아무리 뇌에서 지령을 내

려도 그 명령이 근육에 전달되지 않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마비 증상이 나타난다. 우리 몸의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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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 움직임은 중증근무력증의 먹잇감이 된다. 우리가 걷거나 손발을 움직이는 기본적인 동작뿐 아니라

눈동자를 움직이거나 눈꺼풀을 깜빡이거나 말하거나 호흡하는 움직임도 모두 근육을 움직여야 가능하

기 때문이다. 대응이 늦어지면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중증근무력증은 자가면역 질환으로 자신의 아세틸콜린 수용체를 공격해 파괴한다. 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선 신경 말단에서 방출되는 아세틸콜린 작용을 강화해주는 항콜린에스테라제라는 약물을 투여해야

한다. 또는 스테로이드 약물 등으로 면역 기능을 억제하거나 혈장 교환 시술로 혈중 이상 항체를 제거

하기도 하고. 자가면역 질환과 연관이 깊은 흉선을 외과적으로 제거하는 수술을 하기도 한다.

Part 2_ 강대국 리더들이 결정적 오판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놓게 한 치명적 뇌 질환

미국의 유일한 ‘4선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최악의 대통령으로 만든 질병 - 고혈압성 뇌출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 오늘날의 ‘혈압약’이 있었다면 세계 역사가 달라졌을 것

이라고?: 만약 오늘날 사람들이 흔히 복용하는 ‘혈압약’이 있었고 그 약을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 대

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 투여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동서 진영의 대립이 격화하던 냉

전 시대에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에게 고분고분 순응하는 모습을 보인 루스벨트는 미국인들 사이에서

‘사상 최악의 대통령’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불리며 손가락질당하고 있었다. 만약 혈압약으로

그의 고혈압이 완치되지는 못하더라도 적절히 제어되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 질서를 결정지은

얄타회담 내용이 획기적으로 달라졌을 테고 동서 유럽을 나눈 철의 장막과 현재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민감한 현안인 쿠릴 영토 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다. 고혈압이라는 질병은 도대체 20세기 국제

정세와 이후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친 걸까?

‘일본 해군의 하와이 진주만 공격이 루스벨트 대통령이 일본을 도발하고자 부린 술책이었다’라는 주장

은 과연 사실일까?: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1882년 뉴욕 주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찍이 정치인이

되겠다는 뜻을 품었고, 제1차 세계대전 중 해군에 입대했다. 전쟁이 끝난 뒤 루스벨트는 소아마비를

앓았고 이후 하반신이 마비되는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고 꾸준히 요양하며 재활에

힘쓴 덕분에 활동을 재개할 수 있게 되었다. 1928년 그는 뉴욕 주지사에 당선되었다. 물론 그때도 그

는 주로 휠체어에 앉아서 생활해야 했다.

1929년 10월, 월가의 주가가 폭락하며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1932년 루스벨트는 뉴딜 정책을 구체적

인 공약으로 내세워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1939년 9월, 나치스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유럽에서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루스벨트 정권은 초기에는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으나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

으로 1941년 12월 7일 마침내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의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한편에서는 루

스벨트 대통령이 일본을 공격하고자 일부러 술책을 부렸다는 주장도 있으나 진위는 알 수 없다.

정치인 중에 루스벨트 대통령처럼 유독 뇌혈관 장애를 일으킬 확률이 높은 ‘A형 성격’이 많은 까닭:

“진주만을 기억하라!”고 외치며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에서 참전을 강력히 주장했고 마침내 추축국을

향해 단호하고 선전 포고했다. 그런데도 그는 영국의 처칠 총리와 소련의 스탈린 서기장과 비교하면

제2차 세계대전 중 활약상이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왜 그럴까? 1943년 연합국 수뇌들이 모두

모인 카이로회담과 테헤란회담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눈에 띄게 수척해 보였다. ‘감기가 떨어지지 않

아서’라는 변명으로 둘러댔으나 이후 ‘미국 대통령 건강 이상설’이 나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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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21인의 위험한 뇌

루스벨트 대통령은 잠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A형 성격’이다. 여기서 A형 성격이란

혈액형이 아니라 1950년대 미국에서 생명보험회사가 성격과 심장혈관 질환과의 관계를 조사해 만든

성격 분류법의 한 유형이다. 이에 따르면 심근경색과 협심증 등은 향상심이 강하고, 성격이 급하고, 공

격성이 강한 사람에게 발병하는 사례가 많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런 사람은 뇌혈관 질환을 일으킬

확률이 높았는데 전문가들은 이를 ‘A형 성격’으로 분류했다.

이와 반대로 한 자리에 진득하게 앉아 일하며 인생을 즐기고, 승패에 집착하지 않고 스트레스를 그다

지 느끼지 않는 유형은 B형 성격에 속한다. B형 성격은 뇌와 심장혈관 질환 발병 확률이 상대적으로

낮다. 걱정을 달고 사는 새가슴인 사람은 C형으로, 암에 걸리기 쉽다는 주장도 있다. 흥미롭게도 루스

벨트 대통령은 물론이고 정치인 중에 유독 A형 성격이 많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두꺼운 잎담배를 매일 스무 개비가량 말아 피우는 골초로 동맥경화 증상을 보였을

확률이 높다. 진주만 공습 무렵 그의 혈압은 188/105mmHg로 기록되어 있다. 그때 이미 중증 고혈압

환자였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는 수준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갈수록 기력이 쇠약해진 모습을 보였다.

1944년은 차기 대통령 선거가 임박한 제3기 마지막 해였다. “대통령은 아침부터 무척 피로해 보였다.

대화 중 그는 수시로 졸았고, 가끔 서명 도중 잠시 의식을 잃기도 해서 괴발개발 휘갈겨 쓴 서명이 남

아 있다.” 이는 당시 대통령을 보좌하며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의 목격담이다.

루스벨트 시대의 의사들은 왜 고혈압의 위험성을 간과하고 우습게 여겼을까?: 1944년 3월 무렵 루스

벨트 대통령의 체력은 한계에 도달했다. 그는 숨이 가빠졌고 청색증 증상까지 나타난 워싱턴 교외 해

군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입원 당시 측정한 혈압은 186/107mmHg 고혈압에 울혈성 심부전, 기관지염

진단이 내려져 즉시 치료에 들어갔다. 주치의는 기관지염 예후가 나빠진다며 담배를 줄이도록 요청했

고, 루스벨트는 하루 스무 개비에서 열 개비로 줄였다. 그때만 해도 요즘만큼 담배의 해악이 알려지지

않아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는 인식이 부족했다. 당시에는 제대로 된 혈압약이 아직 개발되지 않았던

터라 고혈압에 대한 병원과 의사들의 대응책이라고는 심리적 안정을 찾도록 하는 일과 신경안정제밖에

없었다.

대통령이 와병 중임에도 차기 정권을 결정하는 선거전이 치러졌다.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루스벨트가

재선에 성공한다고 해도 임기 중 다시 쓰러질 가능성이 크다고 여긴 민주당은 부통령 후보를 매우 신

중히 고려해야 했다. 부통령 후보로 가장 유력한 사람은 현직 부통령 헨리 월리스였다. 그는 확실한

업적과 높은 인지도에 더해 루스벨트 대통령의 신임까지 얻고 있었다. 루스벨트도 윌리스에 대한 지지

를 표명했다. 그러나 윌리스에 대한 강력한 반대 여론이 일어났다. “월리스 부통령은 소비에트 연방과

중국 공산당에 우호적인 급진 좌파다.” 영부인 엘리너 여사도 윌리스 반대론에 힘을 실었다. 결국 미

주리주 상원의원인 해리 트루먼이 부통령 후보로 결정되었다.

1944년 8월 루스벨트 대통령은 요양을 마치고 업무에 복귀했으나 연설 도중 협심증 증상을 보이기도

했다. 손이 벌벌 떨렸고 정상적인 대화도 힘들었다. 정신적으로 혼란스러운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육체적으로는 이미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 가을에는 혈압이 260/150mmHg로 올라갔다. 이듬해인

1945년 1월 20일에 제4기 대통령 취임식이 있었는데 이때도 협심증으로 가슴 통증을 호소했다. 부쩍

야윈 대통령의 모습은 청중에게 충격과 불안을 안겨주었다.

얄타회담 이후 루스벨트가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평가받은 이유: 취임식 직후인 1945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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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21인의 위험한 뇌

월 하순 루스벨트 대통령은 전후 처리를 놓고 스탈린, 처칠과의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소련 크림반도

의 얄타로 향했다. 대통령 일행은 순양함과 수송기를 갈아타고 소련 땅에 입성했다. 그 무렵 소련은

한겨울 한파가 몰아치는 계절이라 늙고 병든 루스벨트에게는 고난의 행군이나 다름없었다. 일부에서는

사악한 스탈린이 일부러 그 시기에 얄타를 회담 장소로 고집했다는 주장도 있다.

2월 4일부터 일주일 동안 열린 얄타회담에서 몇 가지 중요한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대부분 소련에 유

리한 방향으로 결정되었다. 이를테면 독일이 항복한 후 2~3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소련이 일본과의 전

쟁에 참전하고, 동유럽은 소련이 지배하며, 소련과 일본이 맺은 중립 조약을 파기하고 남사할린과 쿠

릴 열도를 소련에 병합하는 등의 결정이었다. 서방측 총수격인 루스벨트 대통령이 건강 문제로 회의에

집중하지 못하는 바람에 미국과 영국이 소련에 밀리는 결과가 빚어졌다. 처칠의 주치의였던 찰스 윌슨

모란경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기력이 쇠할 대로 쇠해 입을 헤 벌린 채

앉아 있었다. 돌아가는 정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중략) 그는 멍하니 입을 벌리

고 앉아 있기만 할 뿐 토론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그가 과연 이 중요한 자리에서 앉을 자격이 있

는 사람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중략) 뇌동맥경화의 다양한 증상을 보였고, 앞으로 살날이 몇

개월이나 남았을까 싶은 인상을 받았다.”

얄타회담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의 혈압은 300/170mmHg로 기록되어 있다. 얄타회담 이후 루스벨트는

한동안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평가받았다. 소련의 거센 공격에 밀려 미국의 권익을 제대로

주장하지 못함으로써 불리한 조건으로 협상을 맺었기 때문이다.

조지아 주 웜스프링스의 별장에서 요양 중이던 루스벨트 대통령은 “누가 뒤통수를 세게 때린 것처럼

아파!”라고 말한 직후 의식을 잃었고 온몸에 경련을 일으켰다. 얄타회담이 끝나고 2개월 후인 4월 12

일의 일이었다. 당시 혈압은 300/190mmHg로 심각한 뇌출혈 진단이 내려졌고, 그로부터 두 시간쯤

뒤 사망 선고가 내려졌다. 그의 나이 예순세 살이었다.

고혈압이 만성화하고 증세가 심해지면 왜 치매 환자처럼 인지 능력을 상실할까?: 고혈압이 만성화하면

혈관 벽이 압박을 견디지 못해 딱딱하게 굳는데, 이를 ‘동맥경화’라고 부른다. 동맥경화를 제때에 치료

하지 않으면 뇌에 장애가 생길 수 있고 집중력이 떨어지고 인지 능력을 상실해 치매 환자와 같은 모습

을 보이게 된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오랫동안 고혈압을 앓았고 시간이 갈수록 증세가 악화되었다. ‘만약 루스벨트가 대

통령으로 재임하던 시대에 고혈압을 다스리는 강압제가 있었더라면 얄타회담에서 그토록 어이없는 결

과가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의 논문이 종전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미국 의학 잡지에

실렸다. 본격적인 강압제인 티아자이드 계열 약물은 195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사용되기 시작했다.

고혈압이 오래 지속되면 동맥경화 등으로 뇌혈관이 터져 뇌출혈을 일으키기 쉽다. 우리 몸 대다수 장

기와 조직에서 동맥은 낭창거리는 나뭇가지처럼 완만한 각도로 가지를 치듯 뻗어나가는데, 뇌혈관은

구조가 복잡해서 급커브를 이루거나 직각으로 분기한다. 따라서 강한 압력이 가해지는 혈류의 급격한

방향 전환은 그 압력을 받는 부분의 혈관 내벽에 상처를 주고 약해진 부분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동맥류가 생길 수 있다.

“운명의 신이 총통의 적을 쳐부수어주었습니다”: 1945년 4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고 소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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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21인의 위험한 뇌

전해진 독일에서는 베를린 공방전이 한창 전개되고 있는 중이었다. “총통 각하, 축하드립니다! 오늘은

13일의 금요일입니다. 운명의 신이 총통의 적을 쳐부수었습니다.” 선전장관 괴벨스가 아돌프 히틀러에

게 보고했다. 그러나 소련은 파죽지세로 진격했고 4월 30일에 히틀러가, 5월 1일에 괴벨스가 자살했다.

그리고 5월 7일 독일은 연합군에 항복했다.

1045년 7월 하순 베를린 교외 포츠담 체칠리엔호프궁에서 연합국 수뇌 회담이 열렸다. 이 회담에서

대일 항복 권고를 주요 의제로 삼은 포츠담 선언이 나왔다. 미국 측에서는 부통령이었다가 루스벨트

사후 대통령이 된 트루먼이 출석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회담 중 미국 뉴멕시코에서 핵실험이 성공했다

는 소식을 받았다. 그때 이미 일본은 해상 봉쇄로 식량과 물자가 부족한 데다 공습으로 온통 파괴되어

그야말로 숨이 넘어가기 직전의 절박한 상황이었다. 일본의 항복은 시간 문제였다.

만약 루스벨트 대통령 제4기 부통령이 트루먼이 아니라 헨리 A. 월리스였다면, 이후 세계사는?: 포츠

담 회담에서 돌아온 트루먼 대통령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를 명령했다. 일본이 포츠

담 선언을 수락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던 시점이었지만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강력히 떠오르고

있던 소련에 미국의 막강한 힘을 보여주고 견제하려는 의도가 담긴 트루먼의 결정이었다.

만약 루스벨트 대통령 제4기 부통령이 트루먼이 아니라 헨리 윌리스였고, 루스벨트 서거 후 윌리스가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면 과연 그는 어떤 결단을 내렸을까? 아마도 월리스라면 원폭 투하 결정 대신 일

본에 항복을 촉구하면서 무력시위를 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았을까? 그리고 만일 그랬다면 일본은 물

론이고 전 세계의 이후 역사의 흐름은 크게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트루먼은 소련이 동유럽에서 세력

을 확장하며 베를린을 봉쇄하자 소련에 대해 강경 태세를 취했다. 이후 양국은 총칼로 대결하지는 않

았으나 군사적으로 아슬아슬한 긴장 상태, 즉 ‘차가운 전쟁’이라 일컬어지는 냉전에 돌입했다.

인민의 영웅 마오쩌둥을 바보로 만들고 중국 공산당을 추악한 권력투쟁의 복마전으로 만든

질병 - 근위축성측삭경화증(루게릭병)

마오쩌둥은 왜 대약진 정책 실패로 인한 엄청난 혼란을 수습하려 하지 않았을까?: 1966년, 중

국에서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불어 닥치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공산당 주석 마오쩌둥이 인습을 타파하

고 새로운 공산주의 문화를 창조하기 위한 개혁 운동이라는 평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문화대혁명은 중국 공산당 내부의 과격한 내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특히, 홍

위병(무장한 중ㆍ고등학생)이 나타나 모든 반란에는 이유가 있다는 ‘조반유리(造反有理)’ 구호를 내걸고

과격한 투쟁에 나서면서부터 더욱더 노골화했다.

이 시기에 정계 최고위층 인사들이 ‘반혁명적’이라는 낙인과 함께 인민재판의 심판대에 세워졌고 잔혹

한 폭력의 희생물이 되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역사가들 중에는 마오쩌둥이 자신이 주도해 펼

친 대약진 정책의 실패로 대규모 아사자가 속출하며 거센 비판을 받게 되자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저지른 권력 투쟁의 일환으로 분석하는 시각이 있다.

문화대혁명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진흙탕 싸움으로 변했고 혼란은 20년 넘게 이어졌다. 여기서 궁

금한 점은 절대 권력을 쥐고 있던 마오쩌둥은 왜 그 엄청난 혼란 사태를 수습하려 하지 않았을까? 결

론부터 말하자면, 당시 그는 난치병으로 인해 사태를 수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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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21인의 위험한 뇌

여색을 밝히는 공산당 최고 지도자, 인민의 아내를 탐하다: 마오쩌둥은 1893년 중국 남부 후난

성의 지주 가문에서 태어났다. 고등교육을 받고 교사가 된 그는 중국 근대화의 열풍에 자극받아 공산

당에 입당했고 지도자가 되었다. 청나라가 몰락한 후 혼란스러운 중국에서 공산당이 국민당과 대결과

화합을 반복했다. 1949년 10월 공산당의 팔로군이 마침내 국민당을 격파하고 중화 인민공화국을 수립

했고, 마오쩌둥은 곧 최고 지도자인 공산당 주석의 자리에 올랐다. 그 후로도 공산당 내부의 권력 투

쟁이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1966년 문화대혁명의 불씨를 지폈다.

1966년 11월, 스무 살을 갓 넘긴 장위펑이 마오 주석을 찾아와 면담을 요청했다. 당시 장위펑은 마오

쩌둥 전용 열차의 철도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녀는 문화대혁명 당시 직장에서 생긴 갈등으로 남편

이 곤란을 겪게 되자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였다. 마오쩌둥은 사건에 개입해 장위펑의 남편 자리를 보

장해준 다음 그녀를 불러들였다.

마오쩌둥은 여색을 밝혔는데, 중국 전역을 시찰하다가 눈에 띄는 여성이 있으면 곧바로 손을 댔고 주

석의 간택을 받은 여성들은 자랑스러워하며 그의 잠자리 시중을 들었다.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은 그

무렵 부인과 질환을 앓고 있어 동침할 수 없었기에 남편의 난잡한 여자 문제를 못 본 척 넘겼다. 그런

상황에서 마오의 침실에 장위펑의 작은 침대가 놓였고, 주석과의 동침도 그녀의 주요 업무 중 하나가

되었다. 장위펑은 참한 외모에 더해 두뇌 회전이 빠르고 업무 능력도 뛰어나 곧 마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인물로 떠올랐다.

“저놈들이 예전엔 나를 죽이려 하더니 이번엔 주석을 잡을 셈이구나!”: 1970년 무렵부터 마오

쩌둥은 호흡기 감염증으로 건강이 나빠질 때가 많았다. 오랜 세월 피워댄 담배가 화근이었다. 마오는

몹시 까다로운 환자로 의사의 말을 잘 듣지 않았고 특히 주사라면 질색했다. 1972년, 기관지염과 심부

전을 앓을 때는 약을 먹지 않겠다고 의사에게 짜증을 내며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그럴 때면 마오쩌둥

의 아내 장칭은 남편의 편을 들며 의사들에게 독설을 퍼부었다. “저놈들이 예전엔 나를 죽이려 하다니

이번엔 주석을 잡을 셈이구나!” 이렇게 말하며

사실 마오쩌둥은 항생제 주사를 맞았다가 쇼크를 일으켜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적도 있었기에 의사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다. 게다가 곁에서 시중드는 장위펑마저 의사들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매일 복용해

야 할 약을 챙겨주지 않았다. 그 무렵 마오쩌둥은 장위펑만 데리고 단 둘이 식사하는 시간이 많았고,

자연스럽게 두 사람 사이에 한층 친밀감이 더해졌다. 그런 터라 심지어 마오의 아내 장칭도 주석의 얼

굴 보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장칭은 장위펑을 주석과의 소통 창구로 삼기 위해 그녀에게 시계ㆍ옷가

지 등 선물 공세를 퍼부었다.

1972년 2월 미국 대통령 닉슨이 베이징을 전격적으로 방문해 마오쩌둥의 개인 공간으로 안내되었다.

당시 주석 비서실은 마오의 좋지 않은 건강 상태를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주석의 건강 이

상을 숨기지는 못했다. 닉슨 대통령의 회상에 따르면 마오는 악수하기 위해 소파에서 혼자 힘으로 일

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기력이 쇠했고 제대로 말도 하기 힘들 만큼 상태가 안 좋아 보였는데, 마오 자

신도 대화가 힘들다고 솔직히 인정했다. 저우언라이 총리가 주석이 기관지염을 앓아 목이 쉬었기 때문

이라고 어설프게 변명했으나 마오쩌둥의 얼굴은 밀랍인형처럼 표정이 없었고 손도 눈에 띄게 떨렸다.

증상으로 보아 그 무렵 마오는 뇌졸중 후유증이나 파킨슨병으로 거둥이 불편해지고 언어 장애가 생겼

다고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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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21인의 위험한 뇌

마오쩌둥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벌어진 살벌한 권력투쟁: 1973년 접어들면서 마오쩌둥의 언어

장애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목이 쉬고 갈라진 데다 목소리까지 작아져 측근들도 알아듣기 힘들어졌다.

오로지 장위펑만 마오의 말을 이해했다. 장위펑이 출산 휴가로 잠시 자리를 비우자 마오는 심기가 불

편해졌고 짜증이 늘었다. 그 탓에 장위펑은 몸조리도 채 마치기 전에 부랴부랴 불려와 다시 주석의 수

발을 들어야 했다. 장위펑이 낳은 아이가 마오쩌둥의 핏줄이라는 소문이 돌았으나 주치의는 마오의 건

강 상태로 보아 불가능하다고 단언했고 중국 공산당도 그 소문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았다.

문화대혁명을 시작한 지 어느덧 7년의 시간이 지났다. 당시 국가 주석이던 류사오치는 많은 고초를

당한 끝에 사망했고, 혁명 초기 중심인물 중 한 명이던 린바오는 마오쩌둥 암살시도가 실패로 끝난

뒤 소련으로 망명하는 도중 비행기가 격추되어 사망했다. 이제 혁명의 향방과 여든 살에 접어든 마오

쩌둥의 후계자가 누가 될 지를 놓고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눈과 귀가 쏠렸다. 급진 좌파인 장칭을

포함한 이른바 사인방과 저우언라이 총리와 덩샤오핑 등 현실 노선 개혁파의 정쟁이 본격화되었다.

이 정쟁은 무력 투쟁을 동반했고 패자는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다. 마오쩌둥은 이제 언어 장애로 의

사소통이 어려웠고 판단력도 악해졌다. 그런데도 정치인들은 어떻게든 마오쩌둥을 자기편으로 엮어 넣

으려고 온갖 술수를 부렸고 마오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며 위세를 과시하기도 했다.

와병 중인 주석의 존재는 오히려 완충장치가 되어 두 세력 모두 결정적인 대립을 잠시나마 피할 수 있

었다. 장위펑은 잠시도 떨어지지 않고 마오쩌둥의 곁을 지켰고, 주석의 말을 알아듣고 그의 입을 대신

해 정부와 공산당 요인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듬해에 마오의 병세는 더욱 급속히 진행되었다.

백내장으로 눈이 침침해졌고 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언어장애도 심해졌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

해 침을 질질 흘렸고 팔다리 근육도 위축되었다.

마오를 괴롭힌 질병, 근위축성측삭경화증: 세 명의 뇌신경과 전문의가 각기 마오쩌둥을 진찰한 뒤

근위축측삭경화증(‘루게릭병’이라고도 부름)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이는 현대 의학으로도 치료가 거의

불가능한 난치병으로 꼽히는 질병이다. 이 병에 걸리면 뇌에서 내보내는 명령이 근육에 제대로 전달되

지 않아 온몸이 마비된다. 그로 인해 보행 장애가 생기고 손을 움직일 수조차 없게 된다. 병세가 더 진

행하면 말과 호흡에 문제가 생기고, 먹고 마시고 삼키는 것도 모두 불가능해진다.

정수리 가운데에 살짝 들어간 부위 주변의 대뇌피질에 운동영역이라는 부위가 있는데 그곳에 있는 신

경세포가 척수 세포에 지령을 내린다. 그 경로가 척수의 측삭이라는 부분이다. 그 부분이 변성(옛 용어

로는 경화)되어 근위축측삭경화증이라는 병명이 붙여졌다. 근위축이란 글자 그대로 근육이 야위며 위

축하는 증상이다. 근위축측삭경화증은 아직도 그 원인과 치료법이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주석의 병을 놓고 ‘폭탄 돌리기’하는 의사들: 최고 지도자의 살날이 앞으로 2년 정도밖에 남지 않

았다는 통보를 받은 정부 요인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주석의 경호대 격인 중앙변공청의 최고책임자 왕

둥싱은 애꿎은 의사들만 다그쳤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뉴욕 주재 국제연합 대표부에 이 병에 대한 치

료법을 수집하도록 지시했지만 미국과 일본에서도 효과적인 치료법이 없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마오의

의사들은 병을 치료하지 못하면 결국 책임을 묻게 되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게 뻔하니 모두 사퇴하

고 새로운 의사단에게 넘기자고 말하기도 했다. 소위 ‘폭탄 돌리기’를 하자는 것이었다.

그 사이 마오쩌둥의 병세는 더욱 급속히 진행되어 이제 음식물을 삼키기도 어려워 코에 튜브를 끼워

영양분을 공급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그런데 마오가 이 방법을 한사코 거부했다. 할 수 없이 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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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21인의 위험한 뇌

대에 누워 장위펑이 떠먹여주는 미음을 받아먹으며 가까스로 연명했다. 마오는 모든 생활을 장위펑에

게 의존했고 장위펑은 마오의 목숨 줄이 되었다. 이듬해에 장위펑은 주석의 수발을 드는 생활비서에서

각료급 기밀비서로 임명되었다. 직급명 그대로 주석의 기밀사항을 처리하고 금고와 문서를 관리하는

업무였다. 이제 주석은 오로지 장위펑을 통해서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었다.

장위펑은 왜 마오의 질병 치료법에 그토록 집착하며 의사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을까?:

근위축측삭경화증은 혀와 목 근육이 마비되어 혀가 잘 돌아가지 않아 말을 할 수는 없지만 두뇌 기능

은 대체로 멀쩡하다. 2018년 3월에 세상을 떠난 영국의 천재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는 젊은 시절

이 병을 진단받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행운아다. 뇌는 근육이 아니니 말이다.” 그토록 가혹한 운명

앞에서도 그는 이렇듯 재치 있는 입담과 여유로 역경을 헤쳐 나갔고 쉼 없이 연구에 몰두하여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요즘은 컴퓨터 기술을 활용한 의사 전달 장치가 발달해 호킹 박사는 학문 연구와 저술

활동에 매진할 수 있었지만 마오쩌둥의 시대에는 그런 장치가 없었다. 오랫동안 환자를 돌보아 온 간

병인이 환자의 입과 눈의 미세한 움직임, 표정으로 의사를 파악하는 식이었다.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장위펑은 정치적 야심이 거의 없었다. 그런 터라 그녀가 영향력을 행

사하고자 했던 분야는 정치가 아닌 마오쩌둥의 치료법에 관한 것이었다. 장위펑은 전문 지식이 없었음

에도 어디선가 주워들은 풍문에 의지해 포도당 수액으로 치료할 수 있다며 고집을 부렸다. 그녀와의

마찰을 꺼린 의사들은 마지못해 찬성해주곤 했다. 장위펑은 의사들이란 작자들이 아무짝에도 소용없다

며 치료를 하지 못하게 했고, 그 탓에 의료진은 간호사로부터 전해들은 정보와 소변 등으로 마오의 병

세를 추정할 수밖에 없었다. 장위펑은 주치의에게 주석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어떻게 좀 해달라며 대

변과 소변을 받아내는 일의 고충을 토로하기도 했다.

측천무후를 능가하는 ‘붉은 여제’를 꿈꾸었던 마오쩌둥의 조강지처 장칭: 마오쩌둥이 중난하이

의 저택에서 힘겹게 투병하고 있는 동안 외부에서는 그의 건강 상태와 무관하게 날마다 피 튀기는 정

쟁이 벌어졌다. 정객들은 자주 마오쩌둥을 방문해 지지를 호소했다. 그러나 마오는 어느 한쪽에 힘을

실어주지 않았다. 어느 날은 덩샤오핑을 비롯한 개혁파를 지지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가 곧바로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어 장칭 등의 급진파 사인방에게 힘을 실어주는 발언을 했다. 마오쩌둥은 장위펑을

통해 의사를 전달했는데 불안정하고 혼란한 정국에서 그의 한마디는 대세를 단번에 뒤집을 수 있는 결

정타가 될 가능성이 컸다.

1976년 1월 저우언라이 총리가 일흔여덟 살의 나이에 전립선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한때 마오쩌둥과

대립하기도 했으나 항일전과 국공 내전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을 건립하기까지 줄곧 마오를 충실히 보

필한 협력자였다. 개혁파에 가까운 그를 추도하는 집회가 자연발생적으로 톈안먼 광장에서 열렸고 집

회는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또한 덩샤오핑은 실각하고 추방되어 이제 사인방 천하로 분위기가 흘러가

는 듯했다.

1976년 5월, 마오쩌둥의 용태가 급변했다. 진료를 반대하던 장위펑을 밀어내고 의사가 진찰한 결과

심근경색으로 밝혀졌고 곧바로 치료가 시작되었다. 5월 말, 마오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번에도

의사가 반강제로 밀고 들어가 진찰한 결과 저혈당 진단이 나왔다. 장위펑이 먹여주는 마음만으로는 충

분한 영양을 공급받지 못해 혈당이 떨어졌던 것이다. 마오가 한사코 거부했으나 반강제로 코에 튜브를

꽂아 영양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6월에 다시 상태가 나빠졌다. 장위펑은 평소와 다름없는 상태라고 주

장했지만 심전도는 새로운 심근경색을 보여주었다. 마오쩌둥 말년에 그를 돌본 기밀비서는 치료를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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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21인의 위험한 뇌

해하는 치명적인 걸림돌이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주석의 건강은 중대한 정치 문제로 자칫하면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도 있었기 때문에 주치의라고 해도 섣불리 손을 쓸 수 없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마오쩌둥 자신이 장위펑을 원했다.

주석의 치료 방침을 정하기 위해 회의가 열렸다. 현재 상황을 설명하는 주치의 리즈수아에게 장칭이

말했다. “의사단은 책임을 회피할 목적으로 주석의 병 상태를 과장하고 있다. 의사들은 무엇이든 호들

갑을 떨고 야단법석을 부리는 족속이다. 사상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의사들이 하는 말은 차 떼고

포 떼고 삼분의 일로 접고 들어야 한다.” 사상 개혁으로 난치병을 치료할 수 있을까? 마오쩌둥의 곁에

는 올바른 판단을 내려줄 사람이 없었다.

그 무렵 마오쩌둥의 뒤를 이어 서열 2위로 올라선 화궈펑은 의사의 설명을 차분히 듣고 이해한 다음

대응해나가기 시작했다. 9월에 접어들어 마오쩌둥의 용태는 더욱 악화했고 장칭이 그의 몸을 억지로

움직여 자세를 바꾸어준 직후 호흡이 정지했다. 즉시 인공호흡기를 부착했으나 며칠 후 마오는 세상을

떠났다. 1976년 9월 9일의 일로 향년 여든두 살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주석 마오쩌둥의 죽음을 계

기로 권력 투쟁이 격화했다.

“주석이 서거하시면 내가 짐이 된다.” 마오쩌둥이 사망하기 며칠 전부터 장칭은 노골적으로 야심을 드

러냈다. ‘짐’이란 황제가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 장칭은 중화인민제국의 붉은 여제가 되고 싶었던 모양

이다. 그는 방을 수색하고 장위펑에게 기밀문서를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마오쩌둥의 금고 비밀번호는

마오 자신과 장위펑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었기에 장칭은 장위펑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필사적

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장위펑은 장칭에게 끝내 문서와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화궈펑과 당 중앙의 반대파에게 넘겨주었다. 결국 사인방이 주도한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고, 주동자인

장칭이 체포됨으로써 문화대혁명의 혼란은 수습되었다. 1976년 10월 4일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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