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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승무원 #28
그녀는 승무원 #28
얼마나 곯아 떨어졌을까. 안디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어디지. 또 시간감각과 방향감각을 상실했다. 안디는 자주 그랬다. 안디는 그런 자신이 그래도 아직 젊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암시했다. 아직 꿈을 깊게 꿀 수 있는 나이. 나이가 더 들면 현실이 너무 짙어져 꿈 속으로도 도망칠 수 없게 되어버릴 것 같았다. 맨날 술에 빠져 사는 어르신들을 보고 안디가 오랫동안 생각한 것이었다. 그렇게 과묵했던 어르신들도 술이 한잔 두잔 들어가면 신세 한탄으로 시작해서 언제나 화려했던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 꿈이 많았던 시절로. 하지만 다시 돌아오는 것은 현실의 신세 한탄이었다. 돌아오지 못할 과거를 추억하고 현실에서 벗어날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는 것이 어른의 세계구나.
골이 아팠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또 들려왔다. 설마, 라는 생각은 역시나였다. 다시 기내식을 주는 시간이 돌아왔다. 이번에는 안디 앞에는 도시락이 놓여 있었다.
“일어나지 않으셔서 그냥 저와 같은 것으로 달라고 했어요.”
아직 정신이 채 돌아오지 않았지만, 옆의 여자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아, 네네. 감사합니다. 너무 깊게 잠이 들었나 보네요.”
안디는 여자가 먼저 말을 걸어서 기쁘다는 생각보다는 못난 모습으로 자지는 않았을까, 입을 헤 벌리고, 침까지 흘리고 – 안디는 대중 교통에 곤히 잠이 들 때는 침을 자주 흘렸다 – 혹시 코는 골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제가 잠버릇이 심해서 무슨 실수를 하지 않았나요?”
“실수요? 뭐 저희가 같이 잠을 자는 사이인가요?”
아차, 싶었다. 같이 러브호텔을 간 것도 아닌데, 잠버릇, 그리고 실수라니. 말을 해도 하필.
“아, 또 말이 그렇게 되나요…….”
“걱정 마세요. 코를 골고 침을 흘렀을 뿐이니까요.”
“네?”
“덕분에 일찍 일어나서 이 책 한 권을 거뜬히 읽어냈네요. 언제 읽나 햇더니…….”
여자가 자신이 가지고 온 책을 들어올려 보였다.
폭풍의 언덕.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이네요?”
“어, 이 소설 아세요?”
퉁명스럽게 자신의 도시락만 바라보면 말하던 여자가 안디를 쳐다봤다.
“아, 읽은 건 아니고, 읽으려고 염두에 둔 책이라서요.”
“아…….”
안디가 읽지 않았다는 말에 다소 김이 빠진 듯 여자는 다시 자신의 도시락에 집중했다.
“실은 제가 기욤 뮈소의 엄청난 팬인데요. 혹시 기욤 뮈소 아세요?”
여자가 다시 안디를 돌아봤다. 다시 호기심이 생긴 듯한 눈빛이었다.
“기욤 뮈소의 소설을 모두 다 읽을 정도로 광팬이에요. 너무 오타쿠 같나요?”
여자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무래도 기욤 뮈소를 아는 표정이었다.
“기욤 뮈소가 애거서 크리스티와 에밀리 브론테의 책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어요. 사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추리소설의 대가이니, 기욤 뮈소의 반전의 방식의 애거서의 영향을 많이 받았겠구나, 하고 짐작할 수 있었는데 말이에요. 솔직히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은 저도 한번도 안 읽어 봤지만, 뮈소의 반전만으로도 그녀가 어떤 방식으로 글을 쓰겠구나 대충 상상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기욤 뮈소의 반전적 글쓰기도 매력적이었지만, 실은 그가 모든 소설에 담고 있는 남녀 간의 운명적 사랑의 방식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거든요. 폭풍의 언덕이 아주 찐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 들었어요. 에밀리 브론테가 어떤 방식으로 폭풍의 언덕을 썼고, 뮈소가 어떤 식으로 영향을 받았을까, 무척 궁금했었죠.”
안디는 말을 그쯤에서 마쳤다. 아무래도 초면에 너무 많은 말을 남발한 것 같았다. 너는 말이 너무 많아서 탈이야, 라는 누나의 조언이 갑자기 폐부를 찔렀다.
“저도 기욤 뮈소 때문에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대박 사건.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는 격의 없이 튀어나오는 말이었지만 눈 앞에 앉아 있는 매력적인 여성 앞에서 그런 격조 없는 말은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뮈소 좋아하세요?”
안디가 묻자 갑자기 여자가 푸하하 소리를 내며 웃었다. 갑자기 터진 매력적인 웃음 소리에 – 조곤조곤 말할 때까지만 해도 그녀의 목소리가 매력적인지 몰랐다 – 앞의 일행이 잠시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 흔히 목소리가 좋은 남자에게 여자는 매력을 느낀다고 한다. 하지만 뛰어난 외모를 가진 여자가 목소리까지 매혹적이면 그건 치명적이다. 그녀의 모든 것, 즉 육체와 영혼 – 안디는 영혼은 목소리를 통해 표출된다고 믿는다 – 이 안디를 순간적으로 빠져들게 하였다. 일순간 왜인지 모르겠지만 선경의 잔상이 스쳐 지나갔다.
“왜 웃으세요?”
“아뇨. 제가 괜찮은 남자를 만난 것 같아서요.”
일순간 안디의 눈에는 그녀의 타오르는 눈빛과 반짝이는 입술, 그리고 그 밑의 가슴골만이 보였다. 마치 그녀가 온 몸과 영혼으로 안디를 유혹하는 것 같았다. 안디는 여자의 갑작스런 말에 피식 웃고 말았다.
“왜 웃으세요?”
역으로 그녀가 안디가 던진 말을 똑같이 내뱉었다. 여자는 본능적으로 남자를 어떻게 유혹하고 요리하는지 알고 있었다.
“손님!”
갑자기 등 뒤에서 승무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디와 여자가 돌아봤다. 선경이었다. 선경의 눈은 웬일인지 격앙되어 보였다. 안디는 무슨 일이냐는 듯 선경을 올려봤다. 안디의 무심한 듯한 표정에 선경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거렸다. 안디는 지금 자신을 사이에 두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달았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안디가 도저히 넘지 못할 것 같은 그 벽, 그 벽 뒤에 도도하게 서 있던 두 여자가 이제는 안디에게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고 있었다.
“음료는 무엇으로 드릴까요?”
안디가 의아한 눈빛으로 올려봤다. 적어도 본인이 알기로 한번 지나간 음료는 손님 한 명을 위해서는 서비스를 하지 않았다. 과도하게 상상하지 말자. 겨우 1년에 한번 비행기를 타는 주제에.
“아까 손님이 곤히 주무셔서 음료를 제공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선경은 철저하게 공적인 일임을 강조했다. 안디의 눈에 저만치 뒤에서 도시락을 오손도손 드시고 계시는 노부부의 모습이 보였다. 마음이 따스한 선경에게는 애초에 당연한 일일 수 있겠구나, 싶어 안디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화이트 와인으로 주세요.”
“네, 곧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주문을 받고 휙 돌아가는 선경의 뒷모습이 어쩐지 경직되어 보였다. 안디는 괜한 상상을 하지 말자, 마음을 다잡았다.
“여기 기내 서비스가 좋네요.”
안디가 앞을 다시 바라보면서 선경 때문에 끊겼던 분위기를 다시 살리려고 말했다.
“저 분하고 아시는 사이세요?”
“아뇨. 전혀요.”
“음. 그래요?”
“왜요? 아는 사이 같아요?”
“아뇨.”
“그런데 왜 그런 질문을 하셨어요?”
“그냥 뭐랄까, 여자의 직감이랄까요?”
“여자의 직감이라, 저는 여자의 직감보다 더 예측하기 어려운 게 있다고 봅니다.”
“그게 뭔데요?”
여자가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기욤 뮈소의 반전?”
여자가 다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여자는 안디가 마음에 퍽 든 모양이다. 6개월을 공들여도 맘처럼 되지 않았던 게 여자의 마음이었는데, 무슨 말을 했다고 이다지도 빨리 열린단 말인가. 안디는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허탈했다. 여자의 웃음소리에 또 앞에 앉아 있던 남자가 뒤를 돌아봤다. 그 남자 옆에 앉은 여자는 남자의 어깨에 기대어 곤히 잠을 청하고 있었다. 나이대나 차림새로 봐서는 결혼한 지 몇 년 된 부부 같았다. 남자는 흘깃 안디의 옆에 앉은 여자를 훔쳐 봤다. 안디는 그 남자의 속마음을 알 것 같았다.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자는 처음 본 여자라는 속된 말이 떠올랐다. 처음 본 여자와 더 이상 사랑할 기회를 없는 남자. 보나마나 그 남자는 조만간 안디의 얼굴도 훑어볼 것이다. 나보다 못났는데 아니면 나보다 잘났는데, 판단을 하기 위해서다. 아무튼 상관없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여자는 곧 내 여자가 될 테니까, 안디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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