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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도와줘야 할 사람처럼 대한다.'
'자신을 도와줘야 할 사람처럼 대한다.'
1759. 인문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9월 23일)
오늘도 제주 바다가 그리워 바다 시진을 또 공유한다. 빛깔이 너무 아름답다. 멀리 보이는 것이 형제 바위이다. 이젠 몇 일전부터 읽고 있던 조던 B. 피터슨의 <<12가지 인생의 법칙(12 rules for life)>>의 이야기를 다시 시작한다. 오늘은 그 규칙 중에 두 번째인, '자신을 도와줘야 할 사람처럼 대한다'이다. 아침 시는 오늘도 이생진 시인의 것이다. <그리운 성산포> 연작시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다.
그리운 바다 성산포 4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사람 빈자리가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사람 빈자리가 차갑다
나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
술에 취한 섬 물을 베고 잔다
파도가 흔들어도 그대로 잔다
저 섬에서 한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달만 뜬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달만
그리움이 없어질 때까지
성산포에서는 바다를 그릇에 담을 수 없지만
뚫어진 구멍마다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뚫어진 그 사람의 허구에도
천연스럽게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슬픔을 만들고
바다는 슬픔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슬픔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슬픔을 듣는다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죽는 이를 못 보겠다
온종일 바다를 바라보던
그 자세만이 아랫목에 눕고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더 태어나는 이를 못 보겠다
있는 것으로 족한 존재
모두 바다만을 보고 있는 고립
바다는 마을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나절을 정신없이 놀았다
아이들이 손을 놓고 돌아간 뒤
바다는 멍하니 마을을 보고 있었다
마을엔 빨래가 마르고
빈 집 개는 하품이 잦았다
밀감 나무에는 게으른 윤기가 흐르고
저기 여인과 함께 탄 버스에는
덜컹 덜컹, 세월이 흘렀다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
살아서 술 좋아하던 사람
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두 짝 놓아 주었다
삼백육십오일 두고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 못하는 눈
육십 평생 두고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어제는 코로나-19 이후 만나지 못하던 형제들을 그룹별로 만났다. 맨 큰 매형은 부부가 투병 중이시다. 건강의 중요성을 자각했다. 그리고 그 다음 누나 매형은 건강했고, 풍성한 밤 과수원을 가지고 있다. 딸과 나는 아침 일찍 거기에 가 밤을 실컷 주우며, 수확의 계절 가을을 만끽했다. 말 그대로 공주 정안 밤들이 탐스러웠다. 사진을 공유한다. 밤도 많이 얻어왔다.
이젠 연휴 기간에 읽기로 했던 책으로 되 돌아 온다. 과학의 세계에서는 분자, 원자, 쿼크라는 기본적인 구성 요소로 환원할 수 있다. 환원한다는 것은 복잡한 체계나 현상을 단순한 법칙이나 물질로 세분화하여 이해하려는 사고이다. 경험의 세계에서도 3가지 원초적 구성 요소가 있다. 연극과 소설도 따지고 보면 이 요소들의 상호 작용이다. 그 중 하나가 혼돈(chaos)이고, 또 다른 하나는 질서(cosmos), 마지막 하나는 혼돈과 질서를 중재하는 과정이다. 피터슨은 이 과정을 '의식(consciousness)'이라고 했다.
혼돈은 미지의 영역이자 '탐험이 안 된 땅'이다. 혼돈은 우리가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것과 모든 상황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혼돈은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 우리가 도착하는 곳이다. 꿈이 좌절되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사업이 망하고, 결혼 생활이 파국을 맞을 때 혼돈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우리 자신을 만날 때이다. 그러나 혼돈은 형태가 없는 잠재적 가능성이다. 혼돈에서 질서가 나오기 때문이다.
질서는 '탐험을 한 땅'이다. 지위와 신분, 권력에 따른 계급 구조가 수억 년 전부터 지배하던 영역이다. 질서는 세상의 움직임이 우리 예상과 기대에 들어맞는 곳이고, 모든 것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진행되는 곳이다. 그러나 확실성과 획일성, 순수성에 대한 집착이 커질 때 질서는 통제와 폭압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질서가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예정대로 진행되므로 새로운 것도, 충격적인 것도 없다.
사물과 대상은 객관적인 세계의 일부이며, 생명도 없고, 영혼도 없다. 따라서 사물과 대상은 죽은 것이다. 그러나 혼돈과 질서는 인격체(personality)로 인식되고 경험되며 이해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뇌는 철저하게 사회적인다. 우리가 살아남고 번식하려면 현실 세계와 맞부딪쳐야 한다. 그 현실 세계는 다름 아닌 다른 생명체 혹은 다른 사람들이다. 우리를 보는 그들의 시선, 그들이 속한 사회이다. 그리고 뇌의 용량이 증가하면서 지적 능력이 향상되며, 그에 따라 호기심도 커졌다. 즉 가족과 집단 바깥에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 왔고, 결국에는 그 바깥 세계를 객관적인 세계로 개념화했다. '바깥'은 탐험하지 않은 물리적 영역만이 아니라, 현재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해'는 '객관적인 설명'을 넘어 '처리하고 대처'하는 모든 행위를 포함한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세계를 뜻하는 질서는 남성성과 관련이 있다. 동양적 사고에서도 질서는 양(陽)과 연결된다. 문제는 질서가 너무 강해져 균형이 무너지면 끔찍하고 파괴적인 일이 벌어진다. 예를 들어 영혼을 좀먹는 획일성은 균형을 잃은 질서의 부산물이다. 반면 미지의 세계를 의미하는 혼돈은 상징적으로 여성성과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혼돈은 가능성이고, 모든 사상의 근원이며, 잉태와 탄생을 주관하는 신비로운 왕국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이원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얻은 지식은 객관적 사실을 설명해 주기도 하지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알려준다. 알게 된다. '무엇'에 대해서 알게 되면, 동시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알게 된다. 객관적인 사실에서 '의무'와 '책임'을 유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동양 철학의 태극도에서 나란히 배치된 음양은 혼돈과 질서가 존재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라는 것을 알려주는 상징이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상징이다. 이 상징이 말하는 삶의 길, 즉 도(道)는 음과 양의 경계에 존재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피터슨에 의하면, 이 '도'가 예수 그리스도가 <요한복음> 제14장 6절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와 <마태복음> 제7장 14절의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와 갈은 길이라는 거다.
이처럼 우리는 혼돈과 질서라는 두 세계의 경계에 서 있을 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생명체가 살아가는 환경과 조건이 혼돈과 질서에 의해 끊임없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른 두 세계의 경계에 서 있으려면,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한 발은 질서와 안전의 세계에, 다른 발은 가능성과 성장, 모험의 세계에 디디고 서 있어야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삶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올 때, 혹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무엇인가에 몰입할 때, 그 순간 바로 혼돈과 질서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이다.
삶에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일은 혼돈과 질서의 상호 작용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이 둘은 삶의 근본적인 구성 요소다. 그래 우리 삶에는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이 있고, 그럴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이 부분에서 그리스 철학자 에픽테토스를 소환한다. 그는 세상의 존재들을 나에게 달려 있는 것과 달려 있지 않은 것으로 구분한다. 전자는 생각, 판단, 욕망, 분노, 혐오처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한 것이다. 후자는 신체, 죽음, 재산, 운, 인기, 평판, 사회적 지위처럼 내 의지대로 할 수 없는 것을 가리킨다. 고통이나 괴로움이 생기는 원인도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으로 여기면서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나를 힘들게 하는 원인은 어떤 것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생각이다.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라 죽음이 두렵다는 생각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나를 화나게 하는 원인은 무례하거나 공격적인 사람들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나를 화나게 하고 있다는 나의 생각이다.”
내 것인 것만 내 것이고, 내 것 아닌 것은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누구도 나의 행복을 방해하지 못한다. 나에게 달려 있는 것만 추구해야 한다. 심지어 운도 내 것이 아니므로 거기에 매달려선 안 된다. 병이나 죽음, 운처럼 나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을 추구하면 불행한 감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 범인(凡人)인 우리들이 스토아 철학자처럼 살 순 없겠지만 지혜는 빌릴 수 있을 것이다. 부부나 자녀 간의 관계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다. 남편이나 아내, 자녀는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을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하니 자연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뜻대로 하려 들지 말고, 나에게 달려 있는 생각이나 분노 등이 내 바깥에서 날뛰지 않게 단단히 고삐를 죄어야 한다. 그것이 자유인의 삶이며, 행복의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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