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차 승무원이 겪은 특별한 탑승객

11년차 승무원이 겪은 특별한 탑승객

누군가에게 비행이 일상에 한 번씩 찾아드는 특별한 하루라면, 하늘이 일터인 승무원에게 비행은 일상과도 같이 익숙한 일이다. 일상 속에서 종종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듯, 승무원들에게는 기내에서 그런 일이 종종 발생하곤 하는데. 특히 여타 서비스 업종과 마찬가지로, 업무 도중 예상치 못한 고객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오늘은 11년의 승무원 생활 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탑승객 에피소드를 이야기해보려 한다.

* 모든 이미지는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으로 내용과 관계가 없습니다.

전남친과의 비행

때는 바야흐로 2~3년 전, 어느 주말 늦은 밤 하와이행 21:00 출발 항공기에 올랐을 때였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밤샘 비행을 대비하여 느지막이 일어나 하루를 보냈다.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향하는 인천공항.

하와이는 언제 가도 좋은 곳이기에 비록 비행이 힘들지라도 승무원들은 꽤 좋아하는 스테이션이다. 아웃바운드(인천-하와이) 비행시간은 생각보다 짧은 편으로 최소 7시간 반에서 길어도 8시간 정도. 다만, 비행시간에 비해 이것저것 나가는 것이 많은 편수이니만큼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다. 꼼꼼하게 가져가야 할 식사와 아이템을 확인하고 탑승 시작!

그날 내 담당 존은 비즈니스 구역이었다. 승무원들은 각자 맡은 담당 구역에서 보딩인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친한 선배 한 명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한 채로 다가와 이야기했다.

“피니야.. 내 담당 구역에 전남친이 탔어...”

한 문장에서 선배의 당황스러움이 충분히 느껴졌다. 심지어 문제의 그 날은 토요일이었다. 그 말인즉슨, 수많은 신혼부부가 결혼식을 끝내고 신혼여행을 가는 편수이기도 하다는 것. 그 전남친 분 또한 아내와 함께 신혼여행을 떠나는 길이었다.

이런 일은 나도 처음이라 당황했지만, 일단 자연스럽게 선배의 구역과 내 위치를 바꿔 보딩 인사를 진행했다. 선배 전 남자친구의 좌석 번호를 보고 동태를 살피니 그 승객분도 선배의 존재를 알아차린 듯한 표정이었다.

우선 급한 탑승을 끝낸 뒤, 갤리(승무원 작업공간)로 모인 우리는 대책 회의를 했다. 일단 팀장님께 사실을 알리고 담당 존을 바꾸는 게 어떻냐 제안했지만, 클래스를 아예 바꿀 순 없는 상황이기에 좌 우 구역만 바꾸기로 결론이 났다. 그 결과, 다행히 해당 승객분의 메인 서비스는 선배 대신 내가 담당하게 됐다.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비행은 끝나고, 항공기는 드디어 하와이에 착륙했다.

하와이 유명 브런치 식당에서 그 승객을 다시금 만나는 웃픈 상황도 발생했지만, 선배는 초연하게 대처하며 상황을 넘겼다. 종종 비행 중에 어학연수 때 만났던 일본인 친구, 가족의 지인 등을 만나는 경우가 있어 세상이 생각보다 좁은지는 알았지만 전 남자친구를 만나는 경우도 생기다니. 만약 나에게도 그런 상황이 다시금 온다면, 그 선배처럼 프로답게 표정 관리를 해야지 다짐했다.

전남친 분들! 혹 비행기에서 승무원 전여자친구를 만난다면 모른 척해주세요!

미군 부대를 태우고 알래스카에서 대구까지

승무원이 꼭 정기노선만 비행하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비정기노선 차터 플라잇을 편성해 평소에 운항하지 않는 곳을 방문하기도 한다. 평소처럼 한 달 단위의 스케줄표를 받아 들고 그달의 일정을 살피는데 처음 보는 3레터코드가 눈에 띄었다. ‘ANC’.

여긴 어디지? 싶어 찾아보니 미국 알래스카주에 위치한 앵커리지였다. 화물기는 취항했지만 객실은 운항하지 않아 조금은 생소했던 곳. 이름만 들어도 추워지는 와중에 왠지 연어를 먹어야 할 것만 같았던 곳, 앵커리지.

낯선 곳으로 향하는 해당 비행은 ‘페리 플라잇(Ferry flight)’이었다. 승객이 없는 빈 항공기를 승무원만 타서 목적지까지 가는 비행. 우린 누구를 태우러 태평양 건너 멀리멀리 가는 것일까. 그 주인공들은 바로 미국 군인 분들이었다. 앵커리지에서 군인 승객분들이 탑승하고 우리는 이들의 보딩에 함께 한 뒤, 대구로 돌아오는 비행 업무였다.

댈러스로 우선 이동해 다시 알래스카 항공을 타고 앵커리지까지 이동했다. 승무원으로 향하지만 승무원이 아닌 듀티. 그렇게 앵커리지에 도착해서 난생처음으로 새빨간 ‘진짜' 알래스카산 연어를 먹으며 하루를 보냈다.

드디어 다음날, 평소와는 조금 다른 서비스에 이것저것 체크할 사항들을 꼼꼼히 한 뒤 비행기에 올랐다. 그런데 갑자기 전해 들은 소식! 이미 군인들이 보딩을 마친 상태라는 것이었다. 다른 크루들이 먼저 댈러스에서 승객들 보딩에 함께 했고 앵커리지에서 승무원만 교대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생전 처음 해보는 뒤바뀐 절차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인수인계를 마치고 기내로 향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근육질의 건장한 군인들이 비행기 내부를 꽉 채우고 있었다. 심지어 분위기 또한 매우 경직되어 있었다. 부대 소속 한국 분이 한 분 계셨지만 모두 외국인인 상황이라 국적 항공사임에도 14시간 비행 내내 영어로 서비스를 해야 했던 매우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특별한 요구사항이나 콜 밸이 울리는 일도 거의 없어서 긴 시간 내내 조용했지만, 승무원 경험 중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색다른 비행이었다. 그때 그분들은 지금쯤 고국으로 다시 돌아가셨을까? 타국에 군인으로 온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님을 알기에 더욱더 마음이 쓰이고 멋져 보였던 승객분들이었다. 그들의 젊은 날 기억 속, 한국에서의 기억이 좋은 기억이길 다시금 바라본다.

어느 노부부의 따뜻한 고향길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유독 기억에 남는 승객 두 분이 계시다. 몇 년 전 미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길, 연세가 지긋하신 노부부께서 탑승하셨다. 하얗게 센 머리가 어딘지 모르게 멋스럽던, 젊으실 때의 멋진 모습이 저절로 그려지던 분들.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따스함과 삶의 지혜가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돋보기로 입국 서류를 어렵게 한 자 한 자 쓰시길래 서류 작성을 도와드렸는데, 여권을 보자마자 역사책에서 보던 숫자가 보였다. 1925년생. 긴 비행 시간동안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는데, 두 분은 여생의 마무리를 고국인 한국에서 하고 싶어 함께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셨다 말씀하셨다.

왠지 모르게 마음 한 켠이 찡해졌다. 90년이 넘은 그 세월 동안 이 두분께는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을까. 맞잡은 두 손에서 보이는 이토록 단단한 사랑은 어떤 삶이었을까. 특별한 사건은 없었지만 따스하게 여겨지는 두 분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지금은 그 여생을 한국에서 찬란하게 보내고 계실지 문득 궁금해진다.

* ‘피니'는 11년 차 승무원이다. 2010년 중국 항공사에서의 2년 근무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국내 항공사에서 근무 중이다. 사람이 좋아서, 여행이 좋아서 시작한 일. 꿈을 이룬 지 어느새 1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 긴 시간 동안 승무원이란 일을 하며 경험했던 세계 여러 나라들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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