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한국 소설 추천 @ 정영수, <내일의 연인들>
한국 소설 추천 @ 정영수, <내일의 연인들>
728x90
반응형
내일의 연인들저자정영수출판문학동네발매2020.10.20.
/
감상
/
서툴러서 미안해, 엄마는 처음이어서,라는 메시지가 미디어에 많이 떠돌던 시절이 있다. 그 이후에 "~는 처음이어서"의 여러 버전들이 등장했다. 새로운 일에 서툰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을 거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처음이다. 모두 처음에서 시작한다.
소설 <내일의 연인들>의 인물들은 모두 서툴다. 소설이라는 것이 본디 다 그렇듯, 어떤 한 인물이 새로운 사건이나 새로운 인물을 만나고, 딱 부러지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인물의 삶이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는 이야기일 것이다. 어떤 사건과 어떤 인물을 만나고, 그것이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소설을 재미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서툰 인물이 능숙한 인물이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여전히 미숙하고 여전히 서툴지만, 그들의 삶이 그저 조금 다른 자리로 옮겨진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불륜을 대필하는 남자(우리들), 이혼해버린 아는 누나의 신혼집에 살게 되는 대학원생(내일의 연인들), 자발적 안락사를 선택하는 이모를 위해 스위스로 떠나는 이혼 위기의 부부(더 인간적인 말), 친구의 갓난 아이를 바닥에 떨어뜨려버린 남자(무사하고 안녕한 현대에서의 삶), 친구의 여자친구의 언니를 흠모했던 남자(기적의 시대), SNS로 염탐하던 옛 썸녀를 따라 베들레헴에 가는 남자(서로의 나라에서). 그들이 사건과 인물을 만나 조금 달라진 세계를 바라보는 것을 통해 나는 나를 겹쳐보고,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을 본다.
소설을 읽으며 친구에게 이렇게 메시지를 했었다. 읽고 있는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이 너무 우유부단하고 소심하고, 실수하고, 결국에는 일을 망쳐버린다. 그런 단편들이 이어지니까 어쩐지 나도 괜히 불안해진다.
나는 실수를 무척이나 두려워하는 성격이다. 원채 사서 걱정하는 성격인데, 걱정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걸 더 싫어한다. 연애를 할 때도 오만 걱정을 다 한다. 잠을 못 잘 때도 있다. 근데 그런 모습을 드러내기를 죽기보다 싫어해서, 혼자 끙끙 앓고 쿨한 척하기 일쑤다. 내 미래를 생각하면서도 그렇다. 이제는 내성이 생겨서 사서 걱정하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실수가 생기면 억지로라도 누워서 잠을 자버린다. 근데 정영수의 이번 소설을 읽으면서는 한 편 한 편을 읽을 때마다 당장이라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고 싶을 정도로 나는 긴장하게 하는 인물들이 등장했다. <기적의 시대>에서는 제발 그러지 마,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책을 읽는데 시간이 많이 드는 편이다. 집중도 잘 못하고, 글을 읽는 게 원채 느리기도 하다. 능동성을 온전히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책 읽기의 시간 중 소설을 읽는 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인문학 소설을 읽고, 과학 서적을 읽으면 상식이 풍부해지고, 지식이 늘어날 것이다. 그럼 소설은 어떤 변화가 있을까? 소설을 읽는 것은 소설의 중심인물이 겪는 변화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이번 소설을 읽으면서 하게 되었다. 소설을 읽었다고 어떤 가치관이 성립되거나, 계몽이 되거나, 지식이나 상식이 (미미하게는 변화가 있겠으나) 풍부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소설을 다 읽고, 접어놓은 귀퉁이를 한 번 뒤적이다 보면, 나는 여기서 저기로 옮겨왔다는 느낌을 받는다. 분명히 이백오십, 삼백 페이지의 글을 읽으며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읽기 전의 나와 읽은 후의 나는 어딘지 모르게 달라져있다. 이게 문학의 매력이 아닐까.
/
필사
/
1.
전공이 적성에 안 맞는다는 이유로 앞뒤 가리지 않고 어디서 났는지 알 수 없는 용기로 대학을 그만두었을 때(그러나 나는 곧 공황 상태에 빠져 허겁지겁 편입 학원을 찾았고), 졸업 후 오랜 기간 매달렸던 언론사 입사 시험을 포기하기로 결심했을 때에도 내 삶이 돌이킬 수없이 망가졌다는 생각으로 절망에 빠졌다. 하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자기혐오인지 자기애인지 알 수 없는 감정에서 기인한 듯한 마조히즘의 도움을 받아 그 일들로 인해 고통받으면서 동시에 그 참담함을 즐겼다. 그것은 나의 장점이자 단점인 지독한 낙관주의와 만성적인 우울증이 결합해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 17페이지, <우리들>
2.
어떨 때는 참을 수 없이 외로워져서 아무 기억이나 붙잡고 그것을 한참 동안 그리워하기도 했다. 그러고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것을 까맣게 잊어버렸는데, 그러다가 다시 또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 18페이지, <우리들>
3.
나는 온전히 나로서 존재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전히 나로서 존재하게 되는 걸 피하고자 했던 것 같다. 꽤 오랫동안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나 돌이켜보았지만, 그건 옳은 질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엇이, 그들이 나를 그렇게 만들 수 있어도 록 했는지가 더 나은 질문이었던 것 같다.
/ 40페이지, <우리들>
4.
그러나 읽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글을 쓰는 것은 생각보다 고독한 일이다. 그래서 어느 날 나는 글을 쓰다가 어쩌면 내가 영원히 혼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게 문득 참을 수없이 두려워졌다.
/ 41페이지, <우리들>
5.
그런데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구원해 줄 수 있을까? 그때의 나는 다소 희망에 찬 내면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면 내가 그 단어를 떠올렸던 이유는 실은 지원과 내가 서로를 구원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그저 서로가 어떤 식으로든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었다는 증거였을 뿐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서로에게 특별한 사람이었던 게 아니라 마침 구원이 필요했던 두 사람이었을 뿐이라고.
/ 64페이지, <내일의 연인들>
6.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누다가 나는 문득 그렇다면 우리가 새 물건을 그만 사게 되는 순간은 언제인가,라는 생각으로 빠져들었다. 내가 지금 사는 물건이 헌것이 되는 걸 내 눈으로 보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 순간은 언제인가,라는 생각들로 빠져들었다. 내가 지금 사는 물건이 헌것이 되는 걸 내 눈으로 보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 순간은 얼마나 나이가 들었을 때일까, 그때가 되면 더 이상 새 물건을 사지 않고, 내가 가진 헌 물건들이 모두 나만큼 낡을 때까지 기다리는 일밖에 없는 것인가, 그럼 내 낡은 몸이 온통 낡은 물건들에 둘러싸인 채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 87페이지, <더 인간적인 말>
7.
사과를 하면 할수록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딘지 잘못된 방향으로, 깊고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는데 그러면서도 그것을 그만두지 못했고, 오히려 그런 기분 때문에 멈추지 못하고 끊임없이 사과의 말을 내뱉었다.
유정은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랫동안 말없이 듣고 있다가 내게 “사과할 필요 없어”라고 말했다. “아냐, 다 내 탓이야. 미안해. 다 내가……” 그래도 내가 사과하는 것을 멈추지 않자 그녀의 말은 “사과하지 마”로 바뀌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유정은 내게 거의 애걸하듯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제발 사과하지 마……”
/ 116페이지, <무사하고 안녕한 현대에서의 삶>
8.
그래서인지 나는 종종 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실감하는 데 실패하곤 했다. 나는 때때로 그 일과 아주 멀어져으며 그럴 때는 마치 그 일 자체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나는 조금 소름 끼치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것은 결국 그 일이 내게 일어난 게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 일은 내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그 일은 참혹하고 불운한 일이었지만 내게 일어난 일이라기보다는 겪은 일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인 듯했다.
/ 117페이지, <무사하고 안녕한 현대에서의 삶>
9.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으면서 가까워지지만 그녀와 나의 경우에는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그 드러나지 않는 부분들을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메움으로써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 같다.
/ 142페이지, <기적의 시대>
10.
지금까지 많은 사람과 관계의 끝을 경험했지만, 그 끝은 늘 선명하지 않다. 오히려 절단면을 확인할 수 있는 이별은 거의 떠오르지 않는다. 연희와도 한순간 이별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조금씩 천천히 멀어졌다. 정확한 시점이 기억나진 않지만 그녀와 마지막으로 얼굴을 봤거나, 마지막으로 연락을 주고받은 이후에도 나나 그녀가 다시 연락을 한다면 특별한 놀라움이나 특별한 반가움 없이도 그것에 응답할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시기가 지나자 이제는 더 이상 그러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 145페이지, <기적의 시대>
11.
깊은 슬픔과 회한이 인간의 정신을 과거로 회귀하게 하는 것처럼 어떤 분노는 그 근원을 탐색하게 한다.
/ 179페이지, <깊을 잘 찾는 서울 사람들>
12.
연인이 된다는 것은 두 개의 삶이 하나로 포개진다는 뜻이다. 그러다 결별의 순간이 오면 다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게 되지만, 어떤 이들은 그 상태가 너무 오래 지속되어 원래의 삶을 잊어버리거나 혹은 잃어버리기도 한다.
/ 185페이지, <두 사람의 세계>
20. 11. 25.에 작성한 글입니다.
728x90
반응형
from http://kaemi.tistory.com/56 by ccl(A) rewrite - 2021-08-26 21: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