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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오소독스 : 밖으로 나온 아이 / 데버라 펠드먼 / 사계절

사투마레(Satu Mare), 또는 이디시어로 사트마(Satmar)는 헝가리와 루마니아 국경에 위치한 도시의 이름이다. 어쩌다 이 마을의 이름을 딴 유대교 근본주의 종파(하시딕)가 뉴욕에 등장한 것일까? 2차 세계대전 당시 헝가리계 유대인 변호사이자 언론인 루돌프 캐스트너가 나치로부터 구한 유대인들 가운데 사트마 마을 출신의 랍비가 있었다고 한다. 랍비는 훗날 미국 뉴욕으로 이주하여 유대인 생존자들을 거느리고 자신의 고향 이름을 딴 종파를 세웠다. 살아남은 다른 랍비들도 각자의 종파를 만들 때 홀로코스트로 인해 파괴된 유럽의 유대인촌(shtetl)과 공동체의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고향의 이름을 따왔다.

미국으로 이주한 하시딕 유대인은 선조들이 입던 의복과 이디시어를 고집하면서 절멸의 위기에 처했던 과거에 집착했다. 그중 많은 이가 유대인 대학살을 동화주의와 시온주의에 대한 벌이라고 믿으며 이스라엘 국가 창설에 반대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시딕 유대인은 나치의 박해로 인해 줄어든 유대인 인구를 회복한다는 사명을 갖고 출산에 주력했다는 점이다. 오늘날까지도 하시딕 공동체는 히틀러에 대한 궁극의 복수를 위해 인구 성장에 몰두하고 있다.

친척 어른들은 하나같이 자식을 엄하게 길렀다. 그들은 아이들을 질책하고 무안을 주고 큰소리로 야단쳤다. 이것이 토라가 알려주는 자녀 교육법 히누흐(chinuch)이다. 부모에게는 자식을 율법을 준수하는 독실한 유대인으로 길러야 할 영적 책임이 있다. 이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형태의 훈육도 허용된다. 할아버지는 오직 종교적 의무 때문에 아이들을 엄하게 대하는 것이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진심으로 화를 내는 것은 금지되지만 히누흐에 따라 화를 내는 척한다는 얘기였다. 우리 집안에서는 가족끼리 포옹이나 키스를 하지 않았다. 서로를 칭찬하지도 않았다. 대신 우리는 서로를 면밀히 주시하면서 언제든지 누군가의 영적 결함이나 신체적 결점을 지적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큰어머니는 바로 이것이 올바른 측은지심이라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우리 공동체에서 학자인 동시에 사업가로 통했다. 낮에는 재무 보고서, 밤에는 탈무드에 몰두하는 할아버지는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정말로 둘 다에 통달하셨을까? 나는 할아버지의 삶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우리 집은 돈이 있어도 쓰는 법이 없었다. 할머니가 몇 년째 다이닝룸의 낡은 파란색 카펫을 바꾸자고 호소했지만 할아버지는 사치는 우리가 누릴 것이 아니라고 고집했다. "삶에서 추구해야 할 것은 신체가 아니라 정신을 기르는 일이오. 사치는 생각을 둔화시키고 영혼을 마비시킬 뿐이오." 카펫에 묻은 포도 주스 얼룩과 빵 부스러기를 지우는 일에서 할머니를 해방시키는 것이 정말로 사치일까?

뒤뜰에서 딸기나무가 꽃봉오리를 피우기 시작하면 야생장미가 담장 철조망 위로 기어올라왔다. 로건베리나무는 베란다 위로 무거운 가지를 드리웠다. 할머니는 튤립에 해가 들지 않을까 봐 걱정했지만, 할아버지는 로건베리는 과실수이고 율법은 과일나무를 베는 것을 금지한다며 손도 못 대게 했다. 우리는 성서의 명령이 없으면 가지치기조차 할 수 없었다. 유월절이 다가올 무렵이면 물컹한 로건베리가 베란다로 철퍼덕 떨어져 바닥을 자주색으로 물들였다. 청소는 항상 할머니의 몫이었다.

할아버지는 영어는 영혼에 스며드는 독약이라고 말씀하셨다. 영어를 읽고 말할 때마다 영혼이 더럽혀져서 더 이상 신성함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신이 허락하신 우리 조상의 언어인 이디시어로만 말해야 한다고 고집하셨다. 하지만 이디시어는 독일어, 폴란드어, 러시아어, 히브리어, 그 밖의 다양한 지역어가 섞인 언어의 잡탕이다. 이 중 대부분은 한때 영어와 마찬가지로 세속적인 언어였다. 그런 이디시어가 어떻게 갑자기 순수하고 지당한 언어가 되었단 말인가?

나는 이제 머릿속 생각조차 이디시어로 하지 않는다. 할아버지가 요사한 뱀과 같다고 묘사한 책들이 나의 막역한 친구가 되었다. 나는 이미 타락했다. 그 사실을 숨기는 데 능숙해졌을 뿐이다. 나는 교실 창문 너머로 도서관을 바라보면서, 어쩌면 할아버지의 예견대로 그동안 읽은 책들로 인해 내 영혼이 타락한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가 심핫 토라 때 렙베의 춤에 감동하지 않은 이유도 설명할 수 있다. 나는 오염된 것이다.

내 직감이 맞았다. 1년 후 민디의 결혼 상대가 정해졌고, 언니들과 마찬가지로 아주 독실한 남자와 결혼했다. 민디는 독서를 포기하고 아이들 키우는 데 전념했다. 우리 사이가 멀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민디는 아이 셋을 낳고 넷째를 임신하고 있었다. 문간에 선 그녀는 갓난아기를 추스르며 미소 지었다. "이게 신께서 원하시는 거야." 나는 치밀어오르는 울화를 억누르며 아파트 계단을 내려왔다. 방금 전에 만난 여자는 내가 아는 민디가 아니다. 내가 아는 민디는 자신을 포기하고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삶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 원하는 거겠지. 민디의 운명은 신이 아니라 주변 사람에 의해 정해졌다. 나의 소중한 친구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아무것도 없었다. 민디의 남편은 나를 나쁜 영향을 주는 친구라고 여겼다. 만남을 지속해서 그녀의 삶을 힘들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늘 민디를 기억할 것이다.

시어머니는 모든 문제는 독서라는 부정한 행위를 저지른 내 탓이라는 듯 일라이에게 내가 더 이상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소장한 책도 다 버려야 했다. 그동안 소파 옆 탁자에 버젓이 놓인 책을 보면서 이제 내 집이 있고, 이 집에서는 취미생활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럴 수 없다. 결국 나는 책을 모두 커다란 비닐봉지에 담았다.

『빨간 머리 앤』을 『워터십 다운』, 『제인 에어』와 함께 쓰레기 봉지에 넣기 전에 마지막으로 손에 들고 낡고 해진 책장을 넘겨보았다. 앤은 내가 가장 좋아했던 인물이다. 튀는 성격에 이런저런 실수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앤은 내가 늘 바라던 방식으로 주변 사람의 사랑을 얻었다. 일라이를 만난 후 마침내 평범하지 못한 나도 그런 사랑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우리가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나는 다루기 힘든 사람이라고 경고했을 때 그가 약속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어쩌면 그 약속은 내가 그에게 복종하도록, 그의 세상에 순응하도록 만들 자신이 있다는 의미였는지도 모르겠다.

토라는 남성 간 성행위나 동물과의 성교는 죄로 규정하지만 아동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내가 이 점을 지적하며 분개하자 일라이가 설명을 늘어놓았다. 옛날에는 다들 조혼을 했고 아동과 성인을 오늘날처럼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았다. 여자를 아홉 살에 결혼시켰는데 아동과 부부 생활을 금지하는 법이 가당키나 한가?

일라이는 요즘 다들 이 문제에 민감하다면서 냉소했다. "열일곱 살까지는 아기 취급을 하다가 열여덟이 된 순간 갑자기 어른이 되라는 게 말이 되나요?" 이웃들도 일라이에게 맞장구를 쳤다. 나는 남자들이 내가 정성 들여 만든 치킨 수프를 먹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내 식탁에서 내가 만든 음식을 먹고 있으면서도 나를 보이지 않는 사람 취급했다. 여자는 대화에 낄 수 없고, 음식을 내오고 상이나 치우면 그만이었다.

나는 무안함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내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일라이는 안식일 만찬에서 내가 너무 열을 올린다고 질책했다. "왜 그렇게 모든 일에 열을 내죠?" 그는 늘 이렇게 불평했다. 다른 여자들은 당신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며 꼭 그렇게 참견을 해야겠느냐고 나를 나무랐다.

하지만 나는 걱정스러웠다. 다들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가 문제를 해결한단 말인가? 탈무드에 '내가 아니면 누가 하는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 하는가?'라는 구절이 있다. 우리는 왜 이 구절을 따르지 않을까?

임신한 이후 점점 더 걱정이 늘었다. 이런 끔찍한 세상에 아이를 내보낼 자신이 없어졌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속한 세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고 살았다. 이제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게 되었지만, 위험을 헤쳐 나갈 방법은 막막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아이를 보호한단 말인가?

시간이 갈수록 나는 엄마가 되었음을 실감했다. 한동안은 내가 엄마처럼 느껴지지 않아서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배 아파 낳은 자식을 보고도 아무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나쁜 엄마가 어디 있을까? 아이와 유대감을 형성하려 하면 할수록 거리감만 느껴졌다. 내 품에서 울다가 잠드는 이 작고 비쩍 마른 팔다리를 가진 존재와 나 사이에 어떻게 해야 사랑이 싹트는 것일까? 내가 아이에게 사랑을 줄 수 없는 인간이면 어떡하지? 중매로 결혼한 남자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과 내가 낳은 자식에게 애정을 쏟지 못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엄마가 되면 마침내 누군가를 온 마음으로 열렬히 사랑하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보니 겉으로만 자식을 애지중지하는 엄마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뿐, 마음속은 공허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하나의 제약이 풀릴 때마다 또 다른 제약이 나를 옥죄고 있음을 발견했다. 게다가 세상에는 내가 절대로 경험하지 못할 일들이 수없이 많았다. 나는 그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지금 누리는 조건부 자유는 충분하지 않아. 진정한 자립을 이루지 못한다면 나는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어.'

최근 새로 단장한 켄트애비뉴에 가보았더니 내 어린 시절의 풍경은 온데간데없었다. 허름한 창고는 유리가 반짝이는 아파트로 바뀌었고, 타이트한 청바지를 입은 힙스터들이 자전거 위로 몸을 구부린 채 내 옆을 스쳐 갔다. 나는 어린 시절의 꿈이 이루어졌음을 깨달았다. 한때 나는 이곳 강변에 서서 건너편 세상을 동경했다. 고층 건물과 화려한 네온사인이 가득한 저곳에서 발 디딜 곳을 찾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런 이유로 나는 지금도 브루클린을 좋아하지 않는다. 갇힌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인생의 출발점이 된, 탈출을 꿈꾸게 한 이곳을 아주 가끔 방문한다. 로알드 달조차도 나와 같은 여정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과거로부터 해방되었지만 과거와 결별하지는 않았다. 나를 있게 한 시간과 경험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 내가 살아낸 삶이니까.

스물다섯에 꿈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때로 나는 너무나 먼 길을 왔다는 감격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앞으로도 자유가 내게 주는 행복은 결코 퇴색하지 않을 것이다. 이 경이로움을 아주 조금이라도 포기하고 싶지 않다.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 김선지 / 은행나무

리돌피나 보르기니 같은 전기 작가들이 마리에타를 어떻게 언급했느냐를 보면, 당시 사회가 여성 미술가를 어떻게 바라봤는지 알 수 있다. 보르기니는 마리에타가 아름답고 우아한 외모와 음악적 재능을 가진 것을 언급한 후, 그림도 매우 잘 그렸다면서 화가로서의 재능은 부수적으로 소개했다. 리돌피 역시 그녀가 하프시코드를 아주 훌륭하게 연주하고 노래를 잘 불렀으며 다른 여성에게서는 보기 힘든 미덕을 지녔다고 여러 차례 찬양한 반면, 그녀의 예술적 재능에 대해서는 겨우 한 번 언급했다.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여성 화가의 예술적 재능은 사람들에게 이차적 관심이었다.

남성 미술가들은 예술성만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던 반면 여성 미술가들에게는 외모와 음악적 소양이 필요했다. 왜일까? 르네상스 시대 아름다운 외모는 내적 미덕을 드러내는 거울로서 여성을 평가하는 중요 요소였다. 따라서 여성 미술가를 평가할 때도 창작력보다는 외모, 음악적 재능, 여성의 부덕이 더 고려되었다. (p.36)

일반적으로 여성의 학업을 등한시했던 르네상스 시대에도 상류층에서는 교양을 위해 딸들에게 미술, 음악, 라틴어 등을 가르쳤다. 앙귀솔라의 아버지는 유명한 선생을 초빙해 딸들을 가르칠 만큼 교육에 열심이었다. 앙귀솔라는 특히 그림에 관심이 많았고 일찍부터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상류층 여성들이 그림을 배운 건 교양과 취미를 위해서였지 전문 화가가 되려는 목적 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화가 집안 출신 여성들도 자신의 이름을 걸고 독립적인 화가로 활동할 수 없었다. 화가 집안에서 태어나 그림을 배우든, 귀족 출신으로 교양을 위해 미술을 접하든 여성이 앙귀솔라처럼 전문 화가가 되고 인정까지 받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그러나 앙귀솔라 뒤에는 남다른 교육 철학을 갖고 딸에게도 차별 없이 전폭적 지지를 해준 특별한 아버지, 아밀카레가 있었다. 앙귀솔라는 아버지의 지원 덕분에 종교화와 초상화로 유명한 베르나르디노 캄피(Bernadino Campi)와 베르나르디노 가티(Bernadino Gatti)에게서 그림 수업을 받았다. 아밀카레는 딸의 재능을 알리고 딸의 그림을 소개하기 위해, 앙귀솔라와 함께 유럽 도시 여러 곳을 여행하기도 했다. 각지 귀족들의 궁전을 방문하고, 로마에 가서는 미켈란젤로에게 딸의 그림을 보여주며 가르침을 청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앙귀솔라는 그녀의 재능에 감탄한 미켈란젤로에게서 2년간 비공식적으로 그림을 배우기도 했다. (p.111)

메리안이 수리남에 도착한 것은 그녀가 쉰두 살 되던 해였다. 17세기 후반의 쉰두 살이란 지금의 평균 수명을 생각하면 아마도 일흔 살쯤은 되었을 나이였다. 경제적 여유가 없었던 그녀는 여행 비용을 위해 255개의 작품을 팔고 네덜란드 당국에 탐사 지원 신청서를 냈다. 처음에는 나이가 많은 데다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지만, 탐사 경비를 갚겠다는 각서를 쓰고 난 뒤 마침내 둘째 딸과 함께 2개월간의 험난한 뱃길에 오를 수 있었다.

수리남의 한 식민지 마을인 라 프로비덩스(La Providence)에 정착한 메리안 모녀는 이후 2년간 나비, 나방, 풍뎅이, 거미, 도마뱀을 비롯한 각종 양서류, 뱀, 열대 식물 등 수많은 토착 동식물을 채집해 표본을 만들고 스케치했다. 또한 동물종의 생활사를 그 발달 단계에 따라 연구하고 기록해두었다. 메리안은 현장 탐사를 위해 현지 가이드의 도움을 받았는데, 당시 회고를 보면 얼마나 가혹한 여정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열대 숲은 엉겅퀴와 가시들이 함께 얽혀 자라고 있었고, 노예들이 손도끼로 그것들을 자르고 길을 만들었다. 아주 성가시고 힘든 작업이었다."

열대의 혹독한 기후 속에서 허름한 집을 빌려 매일 보트를 타거나 걸으면서 농장으로, 숲으로, 강으로 돌아다니는 그녀를 보고, 현지 백인 정착민들은 '미친 여자'라며 수군댔다. 하지만 그녀의 탐구 정신은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1701년, 탐사 도중 말라리아에 감염된 메리안은 수백 점의 표본과 스케치를 들고 암스테르담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1705년, 60여 장의 동판화 작품을 수록한 《수리남 곤충들의 변태》를 출판한다. 이 화집에는 양귀비, 풍뎅이, 애벌레, 아틀라스 나방, 튤립, 석류와 나비 등 아름답고 평화로운 그림도 있지만 악어와 뱀이 치열하게 싸우는 드라마틱한 그림도 있다. 현장 탐사만이 얻을 수 있는 생생한 '동물의 왕국'의 재현이었다. 지금이야 내셔널지오그래픽이 제작한, 먹고 먹히는 생물종들의 투쟁 장면을 안방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지만, 그 당시에 메리안이 동판화에서 묘사한 것과 같은, 개구리 한 마리가 물벌레들에 의해 삼켜지는 생생하고 잔인한 야생의 세계를 어떻게 접할 수 있었겠는가?

메리안은 파리가 죄의 상징이라든지 나비는 부활한 영혼이라든지 하는 문학적 은유로 곤충들을 보지 않고 냉철한 과학적 시선을 유지했다. 그러면서도 린네처럼 형식화된 분류체계 속에 그것들을 가둬두지도 않았다. 또한 그녀의 작품은 과학자의 눈으로 예술적 감성을 그렸다고 할 만큼, 과학과 미학이 성공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p.166-168)

종이 오리기는 회화와 마찬가지로 이차원의 평면에서 탁월한 공간 효과를 창출했다. 세심하게 오린 종이는 완벽한 그림으로 변신했다. 그래서 실제로 작품을 본 사람들은 이것이 그림인지, 종이를 오린 것인지 구별하지 못할 정도였다. 요아나 쿠르턴은 종이가 만들어내는 입체감을 활용해 풍경, 바다, 꽃, 과일, 동물, 건축물, 초상화, 종교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그림 그리듯 재현했다.

종이 오리기는 정확한 세부 묘사를 위해 엄청난 인내심과 오랜 시간, 집중력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특히 그녀의 작품은 마치 펜 그림을 보는 것처럼 아주 세밀했다는 데 그 혁신성이 있다. 그녀가 작업대에 몸을 구부리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종이와 씨름했는지, 이 과정에서 얼마나 숙련된 기술이 필요했을지 상상해보라. 때로는 밀려드는 주문을 소화하기 어려워, 값비싼 비용을 지불하는 왕실 주문도 거절할 지경이었다.

요아나 쿠르턴은 처음에는 풍경을 소재로 작품을 만들다가 황제나 왕과 같은 유명인들의 초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종이를 정교하게 오려 만든 초상화는 여느 화가가 그린 초상화에 뒤지지 않았다. 실물과 닮은 사실적 묘사는 실로 놀랄만한 수준이어서 그녀의 작품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들은 감탄해마지 않았다. 입소문이 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암스테르담 작업실에는 유명 예술가와 시인들의 방문이 끊이질 않았고, 유럽 각국에서 열렬한 관심을 보였다. 국제적 미술가가 된 것이다. 당연히 가격 역시 엄청난 고가로 거래됐다. 어떤 외국인들은 암스테르담까지 와서 그녀의 작품을 사갈 정도였다.

그러나 종이는 손상되기 쉬운 유약한 재료였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그녀의 작품은 현재 겨우 15점만 남아 있다. 간혹 오래된 경매 카탈로그에서 이 15점 외에 개인이 소장한 작품을 엿볼 수는 있지만 그마저 흔치는 않다. (p.239-240)

우리는 실내형 인간 / 에밀리 앤시스 / 마티

그뿐 아니라 집을 항균 화합물로 도배하면 나쁜 미생물만이 아니라 좋은 미생물까지 죽일 수 있다. 집에서 병균은 없애고 싶더라도 건강에 좋은 미생물은 남겨두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 막대한 난점이 있다. 어떤 것이 좋은 미생물인지를 아직 우리가 잘 모른다는 점이다. 피어러는 "병균을 짚어내는 데서는 의학이 정말 뛰어나지만 유용한 미생물을 짚어내는 일은 그리 잘하고 있지 못하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기업들은 프로바이오틱, 가정용 세정제, 공기청정제, 유용한 박테리아를 뿌려준다는 스프레이 같은 제품을 쏟아내고 있다. 한 프로바이오틱 스프레이 회사는 그 제품이 "건강한 박테리아의 균형을 회복시켜" "집에서 건강한 면역계를 일굴 수 있게 해준다"고 선전한다. 하지만 이러한 제품 중 엄정하게 테스트가 이뤄진 것은 거의 없다. 먹는 유형의 제품 등 몇몇 다른 종류의 프로바이오틱 제품에 대한 테스트에서는 대체로 실망스러운 결과가 나왔다. 또 과학자들이 어찌어찌해서 유용한 프로바이오틱 물질을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 해도, 그것을 스프레이로 뿌리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일리노이 공대에서 '건조환경 연구 그룹'을 이끌고 있는 브렌트 스티븐스는 "스프레이는 프로바이오틱 물질을 실어 나르기에 가장 효과가 없는 방식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비타민을 흡수하고자 할 때 공기 중에 비타민을 뿌리고 그 주위를 돌아다니지는 않잖아요?"

그리고 마법 같은 하나의 미생물을 발견하게 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하나의 이상적인 생명체가 있어서 그것이 감기를 막아준다든지 열을 막아준다든지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상적인 미생물계'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건강한 사람 100명에게서 미생물 샘플을 채취하면 서로 다른 미생물계 100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어떤 미생물이 어떤 사람에게는 건강을 증진시켜주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질병을 일으킬 수도 있다. 아동의 성장발달을 돕는 미생물이 노인에게는 위험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정확히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건강한 미생물 군집이 육성되도록 건물을 디자인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캘리포니아 주립대 샌디에고 캠퍼스의 미생물계 연구자 로브 나이트는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로 액셀을 밟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표현했다. (p.51-52)

보행자 친화적이지 않은 동네는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미국 448개 카운티에 사는 성인 20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넓게 퍼진 주거지에 사는 사람이 조밀한 지역에 사는 사람보다 덜 걷고, 체중이 더 나가고, 고혈압일 가능성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상관관계는 다른 연구에서도 반복적으로 발견되었다. 인구 밀도가 높고, 도보 가능한 거리 안에 다양한 용도의 건물이 섞여 있고, 거리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곳에 사는 사람이 더 많이 걷는다. (혹은 자전거를 더 많이 탄다.) 그리고 '도보 가능한' 동네에 사는 사람이 혈압이 더 낮고 혈당도 더 잘 조절된다.

이 상관관계는 도시에서 강하게 나타난다. 뉴욕 거주자 중 가장 보행자 친화적인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여타 사회경제적 요인들을 통제한 뒤에도 평균 체질량지수(BMI)가 더 낮다. 또한 저소득층 동네는 높은 신체 활동 지표와 상관관계를 보이는 시설들, 이를테면 걸어서 가기 좋은 공원, 자전거 도로, 놀이 시설, 공공시설 등이 더 적다.

하지만 지난 20년간 몇몇 과학자, 건축가, 도시계획가들이 도시 공간을 사람들이 더 건강하게 먹고 더 많이 움직이도록 유도하는 방식으로 디자인함으로써 판도를 바꾸기 위해 노력해왔다. 일상 생활에서 신체 활동을 약간만 늘려도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다. 한 대규모 장기 추적 연구 결과, 하루에 열 블록만 걸어도 여성들의 심혈관계 질환 발병 가능성이 낮아지는 것으로 나타났고, 1주일에 계단을 20층 오르면, 즉 하루에 3층이 채 못 되게 올라도, 남성들의 조기 사망 가능성이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p.100-101)

2006년 뉴욕의 '보건 및 정신 위생국'은 '미국 건축가 협회' 뉴욕 지부와 함께 제1회 피트시티(FitCity) 컨퍼런스를 열었고 이것은 곧 연례행사가 되었다. 또한 활동 친화적 디자인 디렉터를 임명했고 몇 년에 걸쳐 근거 기반의 활동 친화적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개발했다.

2010년에 출간된 이 가이드라인은 보행자 도로를 넓히고, 안전한 자전거 도로를 마련하고, 공원과 놀이터 등 공공 레크리에이션 장소를 짓고, 모든 동네에 양질의 슈퍼마켓을 두고, 신체 움직임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건물을 디자인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여기에서 목적은 사람들더러 이렇게 저렇게 살라고 잔소리하는 것이 아니라 출퇴근을 자전거로 하고 점심 먹으러 갈 때 걸어가고 오후 간식으로는 사과를 먹는 것 같이 건강에 좋은 행동이 쉽고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디자인은 사람들을 유혹하는 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 2010년에 마이클 블룸버그 시장의 시 정부에 합류해 '활동 친화적 디자인 디렉터'가 된 조애나 프랭크가 말했다. 경치 좋은 도로가 운전자를 유혹하듯이 아름다운 보행 도로는 사람들을 걷도록 유혹한다. "가로수가 무성하고 널찍하고 시각적으로 흥미로운 것들이 있는 길이 존재하면 사람들은 그 길을 더 많이 걷게 됩니다."

또한 이 가이드라인은 계단의 힘을 활용하도록 촉구하면서, 계단이 잘 보이고 편리하고 넓고 아름답고 건축적으로 분명히 구분되어 있으면 사람들이 엘리베이터를 덜 탄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들을 강조해서 소개했다. 계단 사용을 독려하는 표지판을 두고 계단 근처에 미술품을 놓거나 음악이 나오게 해도 계단 사용 빈도를 높일 수 있다. 2007년 스위스의 제네바 대학 병원은 세 달간 계단 이용하기 캠페인을 벌였다. 병원의 열두 개 층 모두에 계단 사용을 독려하는 포스터를 걸고 스티커를 붙였다. 캠페인 시작 전에 이 병원 직원들은 하루 평균 다섯 층 이하를 계단으로 이동했는데 캠페인 기간 중에는 하루에 거의 스물한 개 층으로 계단 이용이 늘었다. 12주가 지나자 직원들은 체중과 체지방, 허리둘레가 줄었고 혈압과 콜레스테롤이 낮아졌으며 심혈관계 건강도 향상되었다. "이것은 로켓 과학이 아닙니다. 바로 그 점이 정말 고무적인 부분입니다. 달성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는 의미니까요." (p.102-103)

그래도 디자인 팀은 교실에서 아이들이 너무 많이 앉아 있지 않기를 바랐다. 앉으면 우리 몸은 순식간에 생리학적 변화를 와르르 겪는다. 근육이 느슨해지고, 지방이 덜 분해되고, 혈액 순환이 느려지고, 혈당이 오르고, 인슐린이 폭증한다. 너무 많은 시간을 앉아서 보내면 장기적으로 심혈관계 질환, 2종 당뇨, 암 등의 발병 확률이 높아진다.

1953년에 나온 고전적인 연구에서 영국 역학자 제리 모리스는 런던의 전차, 트램, 이층버스 등에서 운전사나 검표원으로 일하는 남성 수만 명의 의료기록을 조사했다. 운전사는 내내 앉아서 일을 하는 반면 검표원은 서 있거나 복도를 돌아다니거나 이층버스의 계단을 오르내린다. 연구 결과, 움직이면서 일하는 검표원들보다 주로 앉아서 일하는 운전사들 중에 관상동맥 심장병이 더 많았고 더 심각했으며 발병 시기도 일렀다. 이후 여러 연구에서, 한번 앉으면 중간에 일어서지 않고 줄곧 앉아 있어야 할 경우 위험이 특히 높아진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중간에 일어서지 않고 죽 앉아 있는 사람이, 하루 중 앉아 있는 총 시간은 길더라도 중간중간 일어나서 짧게 휴식을 취한 사람보다 조기 사망 위험이 높았다. (p.115-116)

버킹엄처럼 대담한 재건축을 시도한 곳은 거의 없지만, 급식 배열을 바꾸고, 곳곳에 계단 표지판을 두고, 옥상 텃밭을 만들고, 로비 바닥을 체육관처럼 탄력 있는 재질로 깔고, 잘 사용되지 않던 공간을 학생, 교사, 학부모가 쓸 수 있는 헬스 시설로 만드는 등 세계 각지에서 많은 학교가 활동 친화적 디자인을 적용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도 열정도 다 좋지만, 황은 프로젝트의 효과를 체계적으로 평가하고 추적하려는 노력이 더 많지 않은 것을 아쉬워한다. "이 부분이 제가 계속 좌절하는 지점입니다. 논의도 많고 관심도 많지만 실증근거의 토대를 정말로 쌓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활동 친화적 디자인이 행동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시사하는 연구는 많다. 가령, 활동 친화적 디자인을 도입하면 계단을 사용하고 자전거를 타는 횟수가 증가한다. 그런데 이것이 장기적이고 실질적인 건강 이득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입증하기가 훨씬 어렵다. 학생들이 과일을 더 많이 집게끔 음식 배열을 바꾸는 것은 좋지만, 매일 과일 한두 조각을 더 먹는 것이 실제로 학생들을 건강하게 만드는지는 어떻게 검증하는가?

디자인은 공중보건을 증진하려는 노력에서 매우 강력한 부분이 될 수 있지만 만성질환을 실질적으로 줄이려면 다방면의 접근이 필요하다. 식품 업체의 마케팅을 제한하고, 급식 가이드라인을 개선하고, 의료시스템을 개혁하고, 설탕과 지방은 너무 싸고 과일과 야채는 너무 비싸게 만드는 농업 정책을 바꾸는 것 등이 모두 포함되어야 한다. (p.129-130)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상호작용과 자판기 옆에서의 대화 같은 비공식적 대화를 촉진하게끔 고안된 사무실도 외향적인 사람에게야 좋겠지만 내성적인 사람에게는 끔찍할 수 있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내성적인 사람은 외향적인 사람보다 소음이나 주의 집중을 분산시키는 요인에 더 민감하다. 또한 이들은 오늘날 너무나 일반적인 개방형 사무실에서 업무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쉽게 조정 가능하고 비용이 덜 드는 등 고용주가 개방형 사무실을 좋아할 이유는 많지만, 사무직 노동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개방형 사무실을 싫어한다.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지 않고, 집중을 방해하는 요소가 많으며, 특히 소음이 심하다. 자판 두드리는 소리, 웅웅거리는 대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리는 환경에서는 복잡하고 고도의 인지 역량을 필요로 하는 업무를 집중해서 완수하기가 어렵다. (설상가상으로 개방형 구조는 기침이나 재채기를 할 때 미생물을 퍼트려서 그 공간의 노동자 모두에게 병을 옮길 수도 있다. 2011년 덴마크의 한 연구에서는 개방형 사무실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개인별로 구획된 사무실에서 일하는 노동자보다 병가를 62퍼센트 더 많이 낸 것으로 나타났다. 병원에서 공용 병실보다 개인 병실이 환자를 감염병에서 더 잘 보호하는 것과 비슷하다.) (p.142-143)

정보 기술 업계 직장인을 대상으로 수행한 연구에서 웨이버와 동료들은 '슬랙' 같은 문자 메시지 서비스가 빠르게 확산되고는 있지만 여전히 대면 소통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실제 얼굴을 보고 이뤄지는 소통이 더 높은 생산성 및 성과와 상관관계가 있었고 특히 업무의 속성이 복잡한 경우에 더욱 그랬다. 대면으로 대화를 나눌 때 팀의 결속도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연구팀은 상호작용을 촉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까이 있는 것'이라는 사실도 발견했다. 웨이버는 "대면이든 디지털이든 당신이 누군가와 소통할 가능성은 책상이 서로 얼마나 가까이 있느냐에 비례한다"며 "이러한 결과를 많은 기업에서 반복적으로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또한 인간이 본질적으로 귀찮은 것을 싫어하고 편리함을 추구하는 종임을 말해주는 사례다. 바로 손 닿는 데 있는 음식을 더 많이 먹듯이 바로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p.148-149)

미국에서 장애인 권리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난 20세기 중반에 자폐증은 아직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미국의 장애인 권리 운동은 1960년대에 흑인, 여성 등 주변화된 집단들의 권리를 확대하려는 더 광범위한 사회적 투쟁의 일부였다. 초창기의 '접근성' 논의는 주로 신체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1961년에 미국 표준협회는 "건물과 시설을 신체 장애가 있는 사람들도 쉽게 접근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휠체어용 경사로, 넓은 문, 화장실의 봉 손잡이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 중 많은 요소가 이후 1990년 미국 장애인법이 제정되고 그와 함께 장애인을 위한 디자인 기준이 마련되면서 공식화되었다. 장애인법 제정은 민권법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순간이었다. 이 법은 장애에 기반을 둔 차별을 없애고 건물이 장애인 접근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장애인법에 따르면 기존 건물에서 "건축적 장벽들을 제거하지 않는 것"도 차별의 한 형태다.) 이로써 접근성이 크게 향상되었고 특히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접근성이 크게 높아졌다. 이제는 경사턱, 경사로, 자동문, 접근성을 높인 화장실 등이 전보다 훨씬 일반화되었다. (p.170-171)

카이로에 있는 아메리칸 대학의 교수이자 건축가이며 자폐인을 위한 디자인 전문가인 마그다 모스타파는 "모든 사람은 좋은 디자인을 가질 기본권을 갖는다"고 말했다. "현재의 디자인 표준은, 말하자면 시각과 청각이 양호하고 통계적으로 전형적인 감각 지각 능력을 가지고 있는 키 180센티미터의 온전한 남성에게 맞춰져 있는데, 그것은 너무나 제약적입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사람을 배제하고 있습니다."

의학의 발달과 수명의 증가는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장애를 가지고 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미국 성인 열 명 중 한 명이 이런저런 종류의 인지 장애를 가지고 있고 지난 몇십 년 사이 인지 및 발달 관련 장애, 특히 자폐와 ADHD 진단을 받은 사람이 급증했다. 또한 장애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 모두 신체적, 정신적 역량의 부침을 겪는다. (p.175)

퍼스트 플레이스 피닉스가 갖는 매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는 명백하다. 이곳은 꼭대기부터 바닥까지 근사한 건물이고 번화한 대도시 한복판에 있다. 이곳은 살고 싶은 곳이고, 그것이 핵심이다. "내가 얻은 커다란 교훈은 자폐인을 위한 디자인은 다른 모든 사람을 위한 디자인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더피가 말했다. "자폐인에게 좋은 디자인은 그냥 좋은 디자인입니다." 자폐인이 환경에 특히 더 민감할지는 모르지만 소음을 줄이고 깜박거리는 전등을 없애고 프라이버시와 개방성 사이의 균형을 맞추고 다양한 종류의 공간을 제공하고 구체적인 필요에 따라 선택지를 열어두는 것은 누구라도 좋아할 디자인 요소다.

메릴랜드 대학의 '건축, 계획 및 보존 대학원' 교수이자 건축가인 매들렌 사이먼은 "보편 디자인의 신조 중 하나는 우리와 '극도로 차이가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잘 맞는 디자인을 만들 수 있다면 '전형적인' 사람들도 득을 본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폐인은 우리에게 유용한 시사점을 줍니다. 비자폐인이 현재 견디고 있는 나쁜 디자인을 그들은 견디지 못하니까요."

장애인이 어떻게 환경을 인지하고 어떻게 환경에 반응하는지, 또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들의 역량을 강화하는 건물을 만들 수 있을지 알게 되면, 궁극적으로 이는 우리 모두에게 더 좋은 공간을 만드는 데도 시사점을 준다. 고전적인 사례는 경사턱이다. 원래는 휠체어 사용자들이 보도를 오르내릴 수 있게 하려고 도입되었지만 유아차를 미는 사람, 카트를 끌거나 자전거를 끄는 사람에게도 도움이 된다. 레스닉은 퍼스트 플레이스의 디자인 목적과 원칙도 이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은 신경 장애 버전의 경사턱입니다." (p.196-197)

대개의 현대 미국 감옥은 의도적으로 가혹한 공간이 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감옥 건물은 처벌을 위해, 즉 가두고, 통제하고, 수치심을 주고, 낙인을 찍고, 지배하고, 비인간적으로 대우하기 위해 고안된 공간이다. 감옥은 인간을 몰아넣은 창고나 마찬가지다. 사람들을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떼어내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 던져 놓은 공간이다. 감옥 환경은 삭막하고 막대한 스트레스를 주며(재소자는 프라이버시, 이동의 자유, 통제력 등을 거의 누릴 수 없다), 삶의 모든 면이 통째로 '사로잡혀 있어야 하는' 총체적인 통제의 공간이다.

이러한 여건이 재소자에게 심각한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많은 재소자가 트라우마, 중독, 정신질환을 겪는다. 미국에는 정신병동이나 정신병원보다 감옥에 중증 정신질환자가 더 많다. 또 많은 이들이 들어갈 때보다 상태가 악화되어서 나온다.

감옥이 막대한 정신심리적 피해를 일으킨다는 것을 보여주는 과학적 증거가 많아지면서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구치소, 교도소, 수용소를 응보의 공간이기보다 사회로의 복귀를 돕는 재활의 공간으로 설계해 더 인간적인 교정시설을 만들고자 하는 건축가들도 생겨났다. 물론 말이 쉽지 실제로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고, 인간적인 감옥을 만들려는 운동은 근거 기반 디자인의 희망만큼이나 한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감옥의 구조를 바꾼다고 해서 너무 많은 사람을 너무 오래 가둬두는 미국 형사사법제도의 근본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p.212-213)

싸움을 말리려다가 난생처음 독방 신세를 지게 된 앤서니 데이비스는 상자에서의 삶이 "폭탄을 맞은 것처럼 충격적이었다"고 표현했다. 상자에 들어간 후 그는 분노의 분출을 잘 통제하지 못했고 반항적이 되었으며, 이후 몇 년 동안 계속해서 교도관과 싸움을 일으켜서 뉴욕 전역의 독방을 전전했다.

(…)

시간이 가면서 그의 생각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삶이 통째로 작은 방에 갇혀 있으면 뇌가 계속 날뛰게 됩니다." 그는 피해망상을 겪기 시작했다. 교도관부터 사랑하는 사람들까지 모두가 그를 괴롭히려고 작당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작은 일에도 분노가 폭발했다. 매사에 공격적, 적대적이 되었고, 소리를 지르고 저주를 퍼붓거나 손에 멍이 들 정도로 벽을 치기도 했다.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우리에 갇힌 짐승 같았습니다. 내 안의 제정신 아닌 부분과 분노가 시시각각 피부를 뚫고 나오려 하는 것 같았어요." (p.221-223)

물리적 환경은 우리가 무엇을, 누구를 가치 있게 여기는지에 대해 강력한 신호를 보낼 수 있다. 2012년의 한 연구에서 코넬 대학 환경심리학자 로레인 맥스웰은 청소년의 자아인식이 그들이 다니는 학교 건물의 질과 관련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밝고 깨끗하고 통풍이 잘되고 유지관리 상태가 좋은 학교에 다니는 고등학생이 어둡고 지저분하고 낡은 학교에 다니는 고등학생에 비해 학업 성적뿐 아니라 자신감도 높았다. 맥스웰에 따르면 "좋은" 건물은 학생들에게 그들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주고 "나쁜" 건물은 반대의 메시지를 준다.

더 큰 규모의 공간도 마찬가지다. 쓰레기가 널린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깔끔한 동네에 사는 사람들에 비해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이 적고 지역 정부에 대한 신뢰도가 낮다. 도시의 녹지가 정신건강 증진을 포함해 상당한 이득을 주지만 단정하지 못한 녹지는 오히려 역습을 가할 수도 있다. 녹지가 잘 관리되지 못한 블록에 사는 사람들은 녹지가 아예 없는 블록에 사는 사람들보다 신뢰가 낮았다. 반대로, 공터를 깔끔하게 관리하면 몇몇 유형의 범죄를 줄이고 주민의 스트레스를 완화하며 동네의 안전에 대한 신뢰가 높아지고 주민들이 집 밖으로 나와 더 많은 친교 활동을 하도록 유도하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p.249-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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