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저출산 시대의 공포를 줄여주는 이야기
저출산 시대의 공포를 줄여주는 이야기
언젠가부터 한국은 저출산의 대명사가 됬다. 불과 한 두 세대 전만해도 아이를 적게 낳자는 캠페인이 활발한 나라였다는 점에서 세상이 무상함을 느낀다. 한국의 저출산은 소멸 위기에 놓인 한국 사회를 상징하는 것 같다. 사회 전반에 공포의 망령이 짙게 내려깔린다. 우리는 아무래도 침몰선에 승선한 승객들과 같은 느낌이다. 어느 쪽부터 먼저 가라앉을까.
한국의 저출산은 단일한 원인으로 정의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나같은 사람은 단언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복잡하다. 하지만 일개 범부도 한국의 저출산이 광기에 휩싸인 한국사회, 모순의 집약체인 한국 사회를 표상하는 또 하나의 위기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한국은 중간이 없다. 국제 센서스에서 뭐든 1위이거나 꼴찌를 기록한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극단에 치우친 것이다. 출산율 또한 그러한 점을 나타낸다.
원인이야 어쨌든 결과가 어떤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한국 사회가 광기에 휩싸였다고한들 안 좋은 지표는 반드시 멸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나 자연은 원리에 편승하는 것 뿐이지, 권선징악의 의식을 지니고 있진 않기 때문이다. 저출산으로 인해 비관론에 빠지거나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필자의 생각을 전하고 싶다. 한국의 저출산은 한국을 멸망으로 이끌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인구학적으로 한국이 소멸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과거 시대라면 저출산 문제는 사뭇 다르게 다가왔을 것이다. 새로운 인구는 적고 노인들만 늘어난다면 그것이 바로 국가의 자연소멸이다. 그러나 우리가 맞이하게 될 세상은 기존의 상식을 초월하는 세계이다. 지금부터 저출산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말해보고 싶다.
1. 저출산은 세계적인 추세
저출산의 원인으로 지적되는 요소는 다양하다. 우리에게도 유명한 맬서스, 다윈 등도 인구학적인 관계를 규명해내려 애썼다. 필자는 사회, 통계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원론적인 이야기밖에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보인다. 소득 수준이 높아지는 모든 나라는 저출산의 길을 걷는다. 즉, 나라가 발전할수록 출산율은 떨어지는 운명이다.
현대에도 출산율이 높은 국가는 개발도상국 이하의 국가들이다. 피임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데다가 인구가 곧 노동력이라는 의미가 여전히 통한다. 얼마간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나라들도 소득 수준이 나아졌을 때 출산률이 저하될 것이다. 정확한 원인에 대한 추측은 분분하지만 중요한 결론이 생긴다. 대한민국만 성장에 따른 저출산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발전된 기술은 오늘도 세계인 대다수를 절대빈곤에서 구출해내고 있다. 결국은 위 국가들까지도 저출산의 추세에 합류할 것은 자명하다. 요컨대, ‘저출산은 전지구적인 추세’이다. 물론 대한민국에서 변화상이 극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존의 추세에 한국 사회의 특수성이 더해졌을 뿐, 대세라는 점은 똑같다.
2. 한국 사회는 이미 포화상태
대한민국의 인구밀도가 높다는 것은 우리에게 생소한 개념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인구밀도는 OECD 국가 중 1위에 해당한다. 동아시아는 전통적으로 물과 식량 생산이 풍부한 인구밀집 지역이었다. 국토 자체가 작아 소국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전세계에서 손꼽히는 인구과잉 지역인 것이다. 필연적으로 삶을 위한 경쟁이 치열해질 수 밖에 없다. 그도 그럴것이 현재 실업자는 실질적으로 100만명 단위를 넘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태생적인 한계에 기술발전으로 인한 산업구조 변화까지 더해진 탓이다. 한국은 이미 인구과잉 상태이다.
한국은 인구를 유지하지 않아도 괜찮다. 지금은 농경시대나 산업화 시대가 아니다. 자동화로 인해 사회가 필요한 인력의 수치는 점점 적어지는 현실이다. 기존의 관점만을 고수해 저출산을 개탄하는 것은 편견일지 모른다. 여러분의 자식이 미래 한국에서 잉여인간의 운명을 겪을 수가 있다. 상상도 못하는 폭탄발언이었지만 이제는 흔할정도로 세상이 바뀌었다. 세상에 아이를 낳는 것이 더욱 더 신중해진 시점이다.
3. 기존의 개념을 거부하는 신인류의 출현
저출산으로 인한 경제활동 인구 감소는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 바뀔 인류의 삶을 전망해본다면 확답이란 없다. 인구 피라미드 자체가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기존의 인구는 사람이 태어나고 늙어가는 생애주기를 철저히 따른다. 그러나 당장 얼마 뒤에 노화가 정복될지도 모르는 시대다. 기술이 실현화된다면 경제활동, 비경제활동 연령의 기준이 소멸된다. 현재 국민보건으로도 정년을 늘리자는 얘기가 나오는 판이다. 생명 연장 기술이 상용화된다면 인구학의 패러다임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지금 부정적인 속단을 하면 무엇하는가. 과연 아이를 많이 낳아야 하는 건지, 이미 태어난 사람으로도 충분한지를 확신할 수 없다. 모든 것이 불확실성 속에 놓여있다. 기존의 인구학적 시각으로 보는 것은 맞지 않을 수가 있다. 인간이 죽지 않는다면 저출산 문제는 한낱 우스갯거리가 되버릴지도 모른다.
4. 인간 이외의 존재 탄생
4가지 중 가장 급진적인 이유다. 미래에는 인간만이 지구를 꾸려나간다는 보장이 없다. 인간 이외의 새로운 존재를 인간이 창조할 것이다. 신인류의 출현처럼 인구학의 기존 패러다임을 통째로 바꾸는 것이다. 그 존재는 인간의 사회, 경제적 역할을 빠른 속도로 대체해나갈 능력을 가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저출산이 무슨 소용인가. 변화하는 시대상에서 마음 속으로 대비하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일수가 있다. 그 시점이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생각보다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은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서 조금씩 느끼고 있지 않은가. 기술은 지금 이 순간에도 기하급수적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고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게 될 수도 있다. 인간 자체도 영생불멸을 얻은 사이보그가 될 것이다. 그때에는 인간과 로봇에 실질적인 차이가 없다. 수 십년 이내에 실현될지도 모른다. 이런 불확실성 속에 놓여있는 것이 현재를 사는 우리들이다.
이렇듯 저출산 기조는 큰 염려가 되지 않을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 이전의 문제가 있다. 출산 자체의 인간적 의미가 그것이다. 자손번식은 인간의 내재적 본능이기 때문이다. 아기를 사회가 필요로 하지 않는 것과 관계없다. 인간은 자신을 닮은 2세를 낳고 기르며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 자식을 키우는 과정까지 수행되어야 호모 사피엔스의 존재의의가 완성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도 그러했다. 중대한 사회적 역할을 박탈당한다면 현대인들은 극심한 공허감에 시달릴 위험이 있다. 새로운 가치가 제시되어야만 한다.
안타깝게도 최고로 좋은 수는 없다. 여러분은 가정을 꾸려야할 인간 중에서는 가장 늦게 태어났다. 현재 시점에서는 완전한 이행이 일어나지 않았다. 가정을 꾸려야할 의무와 현실적 비극들이 상충하는 시점이다. 남들만큼만 아이를 키우는 것은 힘들어졌지만 여전히 가정의 가치는 엄존한다. 과도기적 존재는 고통을 수반한다. 가정부양 일체를 사회가 전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딜레마가 끝날 것이다.
현실의 벽으로 가정을 꾸리지 못하게 된 사람, 공허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무슨 얘기를 해줄 수 있을까. 최선은 없어졌지만 그래도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볼수는 있지는 않을까. 인간은 고난을 이겨내야하기 존재이기 때문이다. 글을 마치기 전에 몇가지 방법들을 제시해보겠다. (참고로 제언에 불과하다. 필자는 실행해볼 계획도 없을뿐더러 이 방법들이 자식의 빈자리를 채워준다는 증거도 갖고 있지 않다. 어디까지나 아이를 사랑해주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대책들이다.)
-
새로운 아이를 갖지 않고도 존재가치를 실현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핵심은 이미 태어난 아이들에게 애정을 쏟아주는 것이다. 사실 당신이 한 명의 아이를 더하지 않더라도 셀 수 없는 아이들이 버려지고 있다. 친부모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손길을 바라는 아이들이 많은 것을 이미 알고 있다.
1. 아이를 입양해서 키우는 방법
물론 어떤 것도 친부모의 존재를 대신해줄수는 없다. 이것은 아동심리학적으로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사람의 자식에게도 애정을 쏟는 것이 가능한 존재이다. 인류애적인 가치에도 부합하는 숭고한 행위이다. 이미 태어나서 힘들고 고통받는 아이들을 위해서 입양을 하는 방법이 존재한다. 아이를 키우고 싶은 욕망이 간절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차선책 중 하나이다. 키울 여건이 안된다면 다양하게 후원할 수 있는 방법도 마련되어 있다. 이미 실행하고 있는 훌륭한 사람들이 많다. 참고로 우리나라에 수많은 고아가 발생했을 때를 기억해보자. 선진국의 착한 가족들이 얼마나 많은 아이를 입양하고 사랑으로 길렀는가. 진정한 국위선양이란 이런 것도 있지 않나 싶다.
2. 조카에게 애정을 쏟는 방법
출산과 양육의 본질은 자신을 DNA 정보를 후세에 전달하는 것이다. 조금 정없이 들리지만 사실이다. 우리의 몸 안에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피가 흐르고 있다. 인간은 이러한 방식으로 부분적으로 영생의 욕망을 충족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가정을 꾸리기 힘들게 한다. 난임 부부의 슬픔 또한 어쩔 수 없다. 자신의 신념이 비혼주의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당신의 DNA는 본능의 부름을 요구할 것이다. 차선책이 있다. 우리의 조카에게 마음을 쏟는 것이다.
결혼이 늦어지거나 자식이 없는 삼촌, 이모가 조카에게 애정을 쏟아붇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이성적인 의사선택이라기보다는 본능의 부름이라고 볼 수가 있다. 자신의 DNA 25%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에게나마 나은 삶을 지원하는 방법이다. 여건이 안되도 너무 슬퍼하지 말라. 당신의 형제가 낳은 자식에게 사랑을 쏟아주는 방법이 있다. 그 아이에게도 삼촌의 사랑은 시기적절하고 필요한 것이다. 파편화하는 가족을 살려주기도 하는 좋은 방안이다.
-
이상 저출산에 대한 필자의 생각과 그에 대한 대응방안이었다.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내 글은 무책임한 예언서가 아니다. 다만 현 시점에서 사람들이 저출산에 갖고 있는 공포를 경감시키려는 글이다. 대한민국은 적어도 인구 문제로는 망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절대적인 불확실성 속에 놓여있다. 부정적인 속단은 금물이다. 예전과는 차원이 달라진 기술사회. 불확실성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 안에서 일종의 낙관주의를 찾는 것이다. 사람 앞일은 어차피 모르는 것, 지레 겁먹는 것보다는 호탕하게 웃는 편이 낫다. 격려의 글을 써본다.
from http://coldrice.tistory.com/18 by ccl(A) rewrite - 2021-07-26 02:2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