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연극전용극장의 탄생과 공연장으로서의 동양극장
연극전용극장의 탄생과 공연장으로서의 동양극장
다.배구자가 구상한 것은 일본의 가무극단체인 다까라츠까(寶塚)소녀가극단 이었다.따라서 배구자는 곧 무용연구소를 가무극단 성격의 단체로 전환시켜 가지고 단성사에서 대대적인 공연을 가졌다.그 때의 레퍼토리를 보면 서양 의 무용과 집시춤,아리랑,방아타령 등 우리 민요의 무용화 그리고 가극이 포함되어 있었다.특히 가극을 했다는 것은 배구자가 단순히 무용만을 추구 하지 않고 연극,음악 등 종합무대를 꾸몄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그것은 배구자가 이 땅에서 일본의 다까라츠까를 시도해 보려 했음을 증명하는 것 이기도 하다.그 시기는 마침 연극사같은 신파극단들이 막간을 발전시킨 악 극을 조금씩 했던 때였던 만큼 배구자의 가무극과 어느 정도 연계가 되었다. 물론 배구자가 시도한 가무극과 신파극단들의 막간극은 질적인 면에서나 내 용면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그렇지만 배구자의 가무극은 신파극단들의 막간극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고 악극으로 발전해 가는데 모델이 되었던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국내에서 인기를 얻은 배구자소녀가극단은 1930년 봄에 일본 순연길에 올랐다.일본인과 똑같은 언어구사와 빼어난 춤,노래솜씨 로 일본에서도 호평을 받았는데,특히 배구자가 관중을 열광시켰다.여러 가 지 레퍼토리 가운데서도 <아리랑>을 무용화한 것이 대호평이었던 바,카페 같은데서도 일인들이 <아리랑>을 즐겨 불렀다. 근 1년여 만에 귀국한 배구자는 연극 쪽으로 더욱 기울어져 <복수의 칼 >(1막)이라든가 <파계>(2막)같은 대가무극을 만들어 단성사 등에서 공연을 가졌다.파계는 방송극작가로 널리 이름이 알려진 이서구의 처녀작으로서 배 구자가극단의 레퍼토리였다.1935년 2월초 삼천리잡지에 <파계>라는 작품을 게재하면서 이서구는 이런 작가의 변을 싣기도 했다. “…나는 반생을 사회부기자로 지낸 사람이다.극을 쓴다는 것은 천만당돌한 일이었다. 그러나 소화 4년경 덴까츠일행에서 탈피하야 경성서 무용과 가극으로 데뷔 하는 배구자 여사의 간청에 의하야,거의 빚졸리는 사람이 돈 변통하듯 하는 생각으로 쓴 것이 <파계> 1편이다.다행히 단성사공연에 호평 -이 호평이라 -21- 함은 입장자 수를 가리킴이다.-탓으로 나는 그 뒤를 이어 전 50막 가량의 무 대 상연용 각본을 쓰게 되고 말았다.이 <타계>는 이런 의미에 있어서 나로 서는 첫아들 격이요,처녀작이라 할 수 있다. 끝으로 이 처녀작을 기어코 쓰게 한 사람이 극계에 원로격인 권일청인 것을 말해 두고자 한다.” 배구자는 활극 뿐만 아니라,<멍텅구리 미인탐방>같은 코미디와 촌극<모 던 장한몽> 그리고 소극도 공연했다.그러나 배구자의 발판은 역시 일본이 었다.덴가쯔이찌자때부터 배구자의 뛰어난 재능을 아는 일본흥행업자들은 배구자소녀가극단과의 전속계약을 졸랐는데 히가쓰(日活)과 마쯔히자(松竹 座)가 그 대표적인 회사였다.배구자는 결국 마쯔히자와 계약을 맺고 일본 전역을 순회공연했다.바로 이때 배구자는 홍순언을 대동했던 것이다.홍순 언은 예술이나 흥행을 전혀 몰랐으나 배구자소녀가극단을 따라다니면서 예 술이나 흥행에 눈떴고 돈도 짭짤하게 모았다.31) 그러므로 홍순언․배구자 부부가 귀국해서 1935년 11월 1일에 한국역사상 최초의 본격적인 연극전용무대인 동양극장을 세울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배경과 경력이 밑받침되었기 때문임은 두 말할 나위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한국인의 손으로 이루어진 연극을 전문으로 하던 극장은 1924년에 토월회가 전세 계약으로 1년간 했던 광무대가 있고 또 함흥에 동 명극장을 꼽을수 있으나 빛을 내지 못했다.32) 당대의 무희이며 구한말의 요화 배정자의 조카딸이었던 배구자와 그의 남 편 홍순언 그리고 지배인 최독견 등 세사람이 주축이 되어 설립된 동양극장 은 1935년 11월 1일에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1가 62번지33)에 설립된 연극전 문극장이었다.동양극장이란 이름은 작가 윤백남의 자문을 받아 지어진 것으 31)유민영,앞의 책(10),pp.172~173. 32)박진,연극에세이 세세연년(2),서울 :세손출판사,1991.p.120. 33)柳敏榮,앞의 책(7),p.231. 연극연출가 박진은 그의 「연극 에세이 세세연년(2)」에서는 “서울 서대문구 밖 마루 터 너머 감영 앞”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22- 로 그가 “조선극장이라는 것은 벌써 인사동에 있으나 조선보다 더 크고 일 본까지를 포함한 동양,동양이라는 이름이 스케일도 크고 사람들이 기억하기 도 좋다.”고 한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동경 다까라즈까(寶塚)극장을 본떠서 지은 동양극장은 대지 488평,건평 373평에 2층 건물로 객석이 648석에 회전무대에다가 호리존트(horizont:극장 에서 하늘이나 원경 따위를 조경효과로 나타내기 위하여 무대안쪽에 활처럼 휜 모양으로 설치한 벽이나 막같은 장치)까지34)제대로 갖춘 조선 최초의 최 고급 연극 전용극장으로 모양세를 갖추었다. 동양극장이 설립될 무렵에 전 조선에서 연극을 할 수 있는 극장은 서울에 앞에서 설명한 조선극장,단성사,우미관,대구의 대구극장,부산의 부산극장, 초량에 중앙극장,함흥에 동명극장,그 후에 선 명보극장,평양에 대생좌,진 남포에 항좌,신의주에 신선좌,광주에 광주극장,목포에 목포극장,군산에 군 산극장 등이 있었으나 함흥의 동명,명보,진남포의 항좌,광주․목포․서울 의 단성사외에는 전 조선의 대․소극장이 다 일인의 것이었고,그나마 연극 을 전문으로하는 극장이 없었는데 동양극장만은 영사실을 만들기는 했으나 애초에 연극을 전문으로 하는 극장으로 세운 것이다.35) 홍순언,배구자,그리고 최독견 등 세 사람이 동양극장을 설립하게 된 동 기와 배경에 대해 연극 연출가 박진은 그의 「연극에세이 세세연년」에서 다 음과 같이 기술했다. “홍순언이가 배구자악극단을 조직해서 일본 吉本興業의 전속으로 있는 동안 흥행업에 눈을 뜨고 경험을 얻어 극장을 전문할 것을 결심하였던 것이다.그 때 배구자악극단이 吉本興業에서 받은 돈은 월 4천원야-적지 않은 돈이지만 그것으로서는 團유지에 겨우 충당되었을 뿐이었다.전반도에 우리 사람의 손 으로 된 극장이 다섯 손가락을 꼽지 못할 때 그는 서울 새 문턱에 큰 극장을 세웠고 더구나 그것을 연극 전문극장으로 했다.”36) 34)위의 책(7),p.232. 35)앞의 책(2),p.118. 36)위의 책(2),pp.120~121. -23- 이상의 연극연출가 박진의 기술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동양극장은 홍 순언이라는 비연극인의 의지로 세워진 연극 전용극장이었다.그는 배구자 무용 연구소와 배구자 악극단에 따라다니면서 계획적으로 많은 경험을 쌓고 또한 예술이나 흥행에 조예를 습득했으며 또한 그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이 일본 인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이렇게 세워진 동양극장에서는 이따금 항 일정신을 고취하는 연극이 상연되기도 했다.흥행만 가능하다면 친일연극은 물론 반일연극의 기획,제작도 서슴지 않았던 사람이 홍순언이었다. 박진은 홍순언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 의주 출생의 홍순언은 어려서부터 열차식당의 보이 노릇을 하다가 나 중에는 평양의 철도국 직영 <야나기 호텔> 지배인으로까지 기어올라 갔는 데…… 이 사람은 어려서부터 자라기를 敬語만 썼고,80%가 일어여서 남과 언 쟁을 할 때도 일본말 경어를 쓰는데,게다가 본시 性情이 온순하니 미모의 젊 은 여자에게 여북 친절 다정하였으랴.”37) 그러므로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홍순언은 영화의 한 장면같은 극적상황을 잘 연출해내는 철저한 흥행사일 뿐 이른바 연극운동가나 문화인 행세를 꿈 꾸었던 사람은 아니었다. 37)위의 책(2),pp.118~119. -24- Ⅲ.연극전용극장의 탄생과 공연장으로서의 동양극장 1.극장의 구조 극장의 역사는 그리스에서 시작하여 로마,이탈리아와 영국의 르네상스를 거쳐 19세기에 이르며,20세기에 들어서는 여러 가지 다른 극장 양식들이 혼 합되어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동양극장은 일본 다까라츠까 극장 형태를 갖고 있다.다까라츠까 극장은 2 차 대전 전에 지어진 것으로 도쿄에 단 하나 남아 있던 극장이었으나 1998 년 여름을 끝으로 폐관,해체되었다. 2차 대전 전의 모더니즘 건축물이자,도쿄 유라쿠초의 상징의 하나였던 도 쿄 다까라츠까 극장은 총 2,546석으로 1934년에 개장되어 2차 세계대전 중에 폐쇄되었고,한때는 풍선기구 폭탄 공장으로 사용되었다.2차 대전 후에는 미군에게 수용되어 <애니 파일 극장>38) 이라는 명칭으로 개칭되었으나, 1955년에 반환되어 재개장 하였다.같은 건물 안에는 영화관 스카라좌(1,197 석)도 있었다. 2001년 재개관된 다까라츠까 극장은 1층에서 6층을 약2000석의 극장으로 하고 지하는 약 800석의 영화관으로,7층에서 17층은 임대 사무실로 되어 있 다.즉 재건축된 다까라츠까 극장은 17층짜리 오피스 식 빌딩안에 흡수되는 형태로 건물 전체가 다까라츠까 극장은 아닌 것39)이다.동양극장은 이런 형 태의 다까라츠까 극장의 모습을 본떠서 지은 것으로 프로시니움 무대 형태 를 갖추고 있다. 38)극장명은 오키나와 전투에서 전사한 종군기자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아네스토 파일이 본명이다.일본인은 관객이 될 수 없었지만,스태프와 연출가는 가능하였다. 예를 들면 세계적인 무용가였던 미치로가 연출과 안무를 담당했다. 39)오자사 요시오 저,이혜정 역,일본의 극장과 연극,서울:연극과 인간,pp.11~12. -25- 프로시니움 무대는 무대와 객석이 프로시니움이라는 일종의 틀에 의해서 객석과 마주하는 형식이다.가장 큰 특징은 프로시니움 아치라는 틀을 통해 관객이 무대를 본다는 점이다.이 프로시니움 아치의 뒤 측은 관객이 가장 보기 어려운 장소이다.따라서 이 주면에는 무대 진행의 핵심이 되는 모든 요소가 집중되어 있다.출연자의 입구,무대진행을 위한 무대감독의 책상,각 종 무대 기수의 조작탁 등이 있다.객석 1층의 앞부분을 오케스트라 피드라 고 한다.음악회나 오페라 전용극장 등에는 오케스트라 위로 말굽형의 객석 또는 상자형 객석이 극장 내부에 띠를 두르듯 몇 겹 둘러져 있는 경우도 있 다.무대 상부는 무대 장치를 미리 올려놓을 수 있는 무대 탑이 있다.이런 프로시니움의 형식은 극장의 도구나 시스템을 관객의 시야에서 가리기에는 가장 이상적인 양식40)으로 오늘날 우리나라 공연장의 대부분이 이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일본의 다까라츠까 극장의 형태를 취하고 프로시니움 무대를 갖춘 동양극 장은 홍순언이 부지매입과 건축비 조달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홍순언 은 우선 배구자 악극단의 일본 흥행 이익금 외에 홍순언이 평양철도호텔 시 절 마련해 두었던 점포와 전화를 팔고 평북 의주의 집도 팔고해서 마련한 돈 전부 4,000원(당시 쌀 한가마니에 7~8원정도)을 조달했다.이 돈으로는 건축은 고사하고 부지매입도 어림없는 형편이었다. 극장의 건축을 위한 땅값 2~3만원의 자금이 필요했고 건축의 총공사비를 견적내보니 19만9천원이 필요했다.혼자 궁리 끝에 홍순언은 일본인 야쿠자 두목을 찾아 갔다.상대는 경성극장과 경성촬영소를 운영하는 대흥행사 와께 지마였다.홍순언은 머릿속에 설계되어 있는 극장 하나 짓기 위해 와께지마 에게 돈 빌려달라고 간청했더니 대륙낭인 와께지마는 홍순언의 읍소에 감복, 상업은행에서 19만5천원을 대부해 주었다. 조선인이 조선 연극 전용극장을 짓는데 일본인 야쿠자의 도움을 빌리지 40) 崔成柱,“公演場.의 무대구성과 전환형식에 관한 硏究”,홍익대학교 산업대학원, 2005,pp.25~26. -26- 않을 수 없었으니 그야말로 아이러니컬한 시대 상황이 아닐 수 없다.결국 홍순언은 4,000원의 밑천으로 상업은행에서 19만5천원의 대부를 받아 연극전 용극장의 총공사비를 조달했다.41) 그들이 동양극장을 건축하게 된 내력에 대해 박진은 다음과 같이 술회했 다.
공유하기 글 요소 저작자표시
from http://marnii.tistory.com/29 by ccl(A) rewrite - 2021-07-21 15: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