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팡세」_인간 실존의 위대한 증언(1)

「팡세」_인간 실존의 위대한 증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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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1623~1662)은 39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쳤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애와 작품에서 우리가 받는 인상은 무엇인가 벅차고 충일된 것입니다. 삶의 도전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인 한 심혼의 격동하는 설렘 앞에 압도당하는 느낌입니다. 만약 그를 하나의 범주, 하나의 방정식 안에 담으려 한다면 이것은 헛된 시도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대순으로 평면적으로 추적하는 대신 몇 가지 특징적인 활동의 범주를 설정함으로써 다층적으로 파스칼의 정신의 여정을 재현해 볼까 합니다.

1. 과학

이 분야에서 파스칼은 단연 그 이름에 합당한 천재였습니다. 그의 업적은 현란하고 또 그의 천재성을 입증하는 일화들도 많습니다. 그의 나이 열두 살 때 있었던, 유클리드 정리 제32번 명제와 관련된 일화는 그중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 에티엔은 아들의 교육에 가별한 관심을 가졌었는데, 그는 지능 수준에 적합한 지식만을 가르쳐야 한다는 원칙하에서 수학은 뒤로 미루고 먼저 어학 교육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원과 선을 그리며 놀고 있는 것을 살펴본 아버지는 그것이 유클리드 기하학의 32번 명제와 일치하는 것을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아들의 뛰어난 재능과 비상한 탐구심을 확인한 에티엔은 이제 더 이상 주저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아들에게 <유클리드 기하학>을 내주었고, 당시 과학자들의 모임인 메르센 학회(후일 과학 학사원의 모체)에 출입하는 것도 허락하였습니다. 그 후 파스칼은 명석성을 갈망하고 사물의 원인을 규명하려는 그의 재능에 가장 적합한 이 논리 형식에 모든 정열과 힘을 기울였습니다. 아르키메데스 이래의 대업적이라고 격찬받은 <원추곡 선론>1640), 2년여의 고심 끝에 재작에 성공한 <계산기>, 3년여에 걸친 <진공에 관한 토리첼리 실험>(1646~1649)등, 그의 과학적 업적은 열거하기가 바쁩니다.

이른바 사교 시대에도 그의 과학 연구는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과학 살롱에서 강연하는 등 다분히 사교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그의 연구는 계속되었으며 기하학, 수학, 물리학 등 각 분야에 걸쳐 여러 논문들이 발표된 것도 이 시절의 일입니다. <액체 평형론>, <수삼각형론>, 등은 그중 대표적인 것들로 그의 사후에 출판되었습니다.

제2의 회심 후 한동안 뜸했던 연구는 1657년에 다시 열기를 되찾았습니다. 회심으로 인해 활동이 억제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과학자들과 교류가 끊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1657년에는 곡선 기하학의 문제로 슬뤼즈와 자주 서신을 교환했고, 1658년에는 더 적극적으로 연구에 참여하여 시클로이드 문제로 전 유럽의 과학자들에게 도전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단순히 학문의 영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용적 기획에도 관심을 보였습니다. <승합마차> 계획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은 로안네 공과 공동 출자하여 이루어진 일로, 일정한 시간에 정해진 노선에 따라 마차를 달리게 함으로써, 파리 시민들에게 교통 편의를 제공한다는 발상이었습니다. 처음으로 계산기를 제작한 파스칼은 역시 근대적 대중 교통의 최초의 착안자이기도 하였습니다.

과학과 관련된 파스칼의 활동은 대충 이상과 같습니다. 순수기하학에서부터 실용 과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도 폭이 넓습니다. 그러나 이 다양성보다 더 놀라운 것은 과학탐구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열정입니다. 실상 이 정열에는 두 개의 큰 장애가 있었습니다. 건강 문제와 회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파스칼은 어려서부터 매우 허약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파스칼 자신의 고백에 의하면 18살에 이름 모를 중병을 앓은 후로는 단 하루도 평안한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육체적 고통을 무릅쓰고 그는 연구에 몰두하였고 계산기, 토리첼리 실험, 훗날의 시클로이드 연구 등은 바로 그러한 고통 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이 육체적 악조건이 학문 연구에 대한 외적 위협이었다면 그의 회심은 내적 장애에 속합니다. 질베르트는 <파스칼의 생애>에서 최초의 회심 이후 그는 모든 연구를 그만두었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유일한 일에 전념하기 위해 기타의 모든 지식을 포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이미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비록 학문을 포기하는 결단에 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해도 그의 회심은 신의 부름에 더 충실하기 위해 적어도 그래야 한다는 필요성을 그가 느끼게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파스칼은 스스로 억누르기 위해 벅찬 과도한 지적 호기심에 시달렸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심정의 열정이 있다면 지성에도 열정이 있습니다. 그의 지성은 어떤 가공할 무기로 무장되어 있었으며 항상 전투적이고, 자신감과 야망에 불타 오르고, 우월감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겸손을 미덕으로 하는 기독교도로서 이런 태도는 빈축을 살 만도 합니다. 그러나 파스칼을 성자로 꾸며내려는 시도에 동의하고 싶지 않습니다. 여기 파스칼의 인간적인 모습이 있으며 그것으로써 그는 우리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옵니다. 한편, 폴발레리가 푸념한 것처럼 회심으로 인해 그의 지성이 제약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파스칼의 지성은 지성으로서 충분히 피어올랐고 회심은 이 극한에 달한 지성에 비약의 새 동기를 마련한 것뿐입니다.

대체 그에게 기하학이란 무엇인가요? <기하학 정신>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것은 사고와 논리의 가장 순수한 형식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사고의 한 방법론으로서 논리의 엄정성을 본질로 삼은 형식입니다. 구체적으로 기하학적 방법은 모든 말의 정확한 <정의>, 이 정의에 입각한 모든 명제의 <증명>, 그리고 이 정의와 증명을 바탕으로 다시 새 명제를 이끌어내는 <논증>으로 성립됩니다. 어느 대상에 대해서나 그 방법론과 기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훈련된, 충일하고 세련된 논리의 메커니즘 - 파스칼이 기하학에서 배운 것으로 바로 이것입니다.

그가 기하학에서 배운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다름 아닌 기하학적(즉, 이성적) 사고의 한계입니다. 정교하고 엄정한 이 논리의 메커니즘은 기능적으로 아무리 유효하다 해도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으며, 이 한계를 정직하게 인식하는 것은 이성에 부과된 최후의 의무와 같은 겁니다. 독자적 논리와 그것에 대한 긍지를 가지고 있는 이성은 그 어떤 외부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이성은 그 자신의 반성적 성찰에 의해 자신을 부인할 수 있습니다.

"이성의 최후의 한걸음은 자신을 초월하는 무한한 사물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373)

이성에 대한 이 변증법적 비판을 통해 비로소 파스칼은 초월성으로 이행합니다.

이렇듯, 이성에 대한 파스칼의 인식에는 긍정과 부정의 양면이 있습니다. 이성은 그것의 한계 안에서 탁월한 분석과 논증의 도구가 될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초월적 세계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되며 반대로 자신을 낮추고 부인함으로써 초월적 세계로의 길을 터주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인식 가운데 우리는 <팡세>의 방법론의 한 축을 발견하기를 원합니다. 그는 인간 존재와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있어 이성과 함께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며 이성으로 하여금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이성적 사고가 끝내 한계에 부딪히는 데 있습니다. 결국 파스칼은 이성에 충분한 기회를 주되 그렇게 함으로써 그 스스로가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초월성 앞에 자신의 무기를 내려놓게 되기를 바라는 겁니다. 파스칼이 이성에 위탁한 역할은 이런 겁니다. 그것은 신앙의 초월성을 수용하게 하는 데 있어 피할 수 없이 겪어야 할 과정이며, 말하자면 일종의 정지 작업과 같은 겁니다.

이렇게 볼 때 파스칼의 기하학은 결코 그 자체로서 유리된 지적 유희는 아닙니다. 물론, 파스칼이 지성의 찬란한 축제에 매료되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에 이끌리면 이끌릴수록 더욱더 지성의 좌절을 통감했던 그는 더 높은 차원으로의 비약을 그 안에서 꿈꾸고 있었습니다.

2. 사교시대

파스칼의 생애 가운데 가장 모호한, 그러나 학문 연구에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시기가 있습니다. 아버지 에티엔의 죽음(1651년)을 전후한 이른바 사교 생활이 바로 그것입니다. 질베르트의 전기에 의하면, 고된 계산기 제작 작업으로 악화된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의사들의 권고대로 정신의 긴장을 피할 수 있는 사교 생활에 들어간 것이라 합니다. <그의 생애 가운데 가장 소모적인 시기였다>고 그녀는 덧붙입니다.

이 시기와 관련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극히 단편적이고 모호한 것들뿐입니다. 특히 아버지가 타계한 후부터 제2의 회심에 이르는 3년여의 생활은 거의 안개 속에 가려져 있어 온갖 억측을 낳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하나의 지엽적인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사교 생활의 성격, 특히 그의 기독교 신앙과의 관계일 겁니다.

먼저 아버지와 사별하기 전까지의 생활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1647년 자클린과 함께 루앙에서 파리로 돌아온 것을 기점으로 할 때 이 기간의 파스칼의 활동은 비교적 알려져 있는 편입니다. 그중 대표적인 자료들은 1647년에서 1649년에 걸친 토리첼리 진공 실험과 관련된 논문들과 논쟁 그리고 누이 질베르트와 주고받은 편지들입니다.

다분히 세속적인 분위기 속에서 학문 연구의 열정을 불태웠던 이 시절에 파스칼은 자신의 신앙에 과연 충실할 수 있었을까요? 그러나 그의 신앙 생활은 결코 과소평가할 성질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녀가 되려고 한 자클린을 격려하고 수녀원의 출입을 도와준 것도 파스칼이었고, 생 탕주라는 이단적 사제를 끝까지 추궁하여 교회로부터 단죄받게 한 것도 파스칼이었습니다. 질베르트와의 서신은 그가 성서 읽기와 명상을 게을리 하지 않았음을 입증하고 있으며 그의 지식이 단순히 교리적이고 외적인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이미 그는 몇몇 기본적인 신앙의 개념들을 확실히 파악한 것으로 보이며, 특히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는 10월 17일의 편지는 신앙의 내적인 설렘에 넘치는 아름다운 명상의 기록입니다. <만약 6년 전(제1의 회심 전)에 아버지를 잃었더라면 나는 파멸했을 것이다>라는 말은 깊은 여운을 남기는 비통한 신앙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질베르트는 이러한 파스칼을 세속적 정신에 사로잡힌 것으로 판단했을까? 확실한 것은 그가 전적으로 신앙에 헌신하지 않았다는 것과 학문 연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파스칼의 신앙의 깊이를 측정하는 것은 편협한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 이보다 더 심각한 일이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천재성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의식은 마침내 오만에까지 이르렀고 정신의 왕자로서의 긍지는 지나친 우월감으로 표출되곤 하였습니다. 거듭된 성공은 그에게 명예의 매력을 맛보게 하였고, 이로써 활짝 열린 사교계 안에서 그는 유유자적한 듯 보였습니다.

아버지와 사별한 후의 파스칼의 삶은 더한층 따라가기가 힘듭니다. 별다른 저술도 없고 질베르트와 서신도 끊어졌습니다. 파스칼의 또 하나의 전기를 쓴 조카 마르그리트 페리에는 <재산을 차지한 파스칼은 자유롭게 사교계에서 생활을 계속하였다>고 전합니다. 그는 끝내 신앙의 동요를 느낀 것일까요? 여기 하나의 암시적인 사건이 있습니다. 수녀가 되기를 원했던 누이 자클린은 유일한 반대자였던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더 이상 주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파스칼 자신이 맹렬히 반대하고 나섭니다.이 반대를 무릅쓰고 자클린은 끝내 수녀가 되고 말았지만 파스칼은 이에 말할 수 없는 비통함을 느꼈습니다. 이와 같은 파스칼의 태도의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여기에서 신앙의 문제보다 인간적 비극을 읽기를 원합니다. 어머니 없이 자랐고 이제 정신적 지주였던 아버지마저 잃은 파스칼이, 이제는 자랄 때부터 정신적 쌍둥이와도 같았던 자클린마저 잃게 되었을 때 그는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고아와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이대의 일을 단순히 파스칼의 약점으로 매도할 수만은 없습니다.

어쨌든 이 시기와 관련해서는 그 어떤 것도 단정적으로 이야기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시절에 이른바 사교인들, 더 넓게는 교양인들과 상당히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이며 우리는 이것에 커다란 중요성을 인정하기를 원합니다.

파스칼이 귀족인 로안네 공을 위시하여 사교계의 교양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것은 이들의 이름이 이따금 <팡세>안에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교양인들이란 어떤 사람들일까요. 이들은 각기 신분이나 개성의 차이를 넘어 그들 나름의 삶의 미학을 지향하는 데 있어 일치된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신의 자유와 다양성을 믿으며 그 가운데서 인간이 자신을 규제하고 타인들과 조화롭게 교류할 수 있는 어떤 우아하고 세련된 삶의 유형을 추구합니다. 다분히 몽테뉴의 회의주의에 경도된 이들은 <교양인>이라는 하나의 보편적 인간상을 꿈꾸었던 겁니다. 모든 것은 인간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며 그 저변에는 인간성에 대한 신뢰가 깔려 있습니다. 학문의 좁은 세계에서 자란 파스칼이 이들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이들의 자유분방하면서도 그 나름의 절도와 우아함을 지닌 삶은 정녕 그에게는 새로운 발견이었을 겁니다.

파스칼은 이 세속과의 만남에서 마음의 동요를 얼마나 느꼈을까요? 과거, <팡세>의 몇몇 부정적인 구절들을 과정한 나머지 파스칼을 불안과 우수의 시인, 심지어는 회의와 절망의 햄릿으로 그려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오늘날 이와 같은 해석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파스칼의 사상에 감도는 비극적 기류를 부인하거나, 파스칼을 고뇌의 그림자도 없는 평안의 스승으로 받드는 것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의 비극성은 결코 낭만주의자들의 감상적인 비애나 현대 작가들의 음울한 절망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신 앞에서의 비통한 호소이고, 구원을 갈구하는 애절한 몸부림입니다. 이 호소와 몸부림을 파스칼은 이들 안이한 낙관주의자들의 잠자는 의식 속에 불어넣으려고 시도할 겁니다. 그는 이들에게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를 꿰뚫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신 없는 인간, 무종교의 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을 이들을 통해 얻을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 교양들의 세계는 일찍이 그가 몸담았던 학자들의 세계와는 다릅니다. 이들은 관대하고 재치 있고 사교적이며 타인들의 의견과 종교를 존중합니다. 이들이 믿는 것은 인간이라는 가치와 그 다양성입니다. 파스칼은 분명 이들의 탄력 있는 정신에 매혹을 느꼈을 겁니다. 그러나 매혹만 느낀 것은 아닙니다. 그는 이들의 정신과 삶의 태도 안에 숨겨져 있는 모순과 위선을 꿰뚫어 보았으며 그들이 고집하는 인간적 범주 안에서 인간은 질식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이들과 한때 함께 하였던 파스칼은 이들과 결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무한히 인간을 넘어선다>는 것을 이들에게 보여주며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라고 강력히 권유하는 것입니다. 파스칼의 인간학은 필연적으로 인간을 넘어서는 초월성으로 연결됩니다.

요컨대 파스칼은 보다 많이 보다 깊이 인간을 배웠습니다. <팡세>안에 펼쳐지는 놀라운 인간학은 이 현실 세계와의 직접적인 만남, 인간 실존 안에서의 편력이 없었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겁니다. 그의 사교 생활은 그의 생애 가운데 <가장 소모적인 시기>가 아니라 그의 성찰과 깨달음의 가장 소중한 밑거름이었습니다.

3. 신앙

파스칼 일가가 루앙에 체류하던 때(1639~1648), 그들에게 일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들 모두가 기독교 신앙으로 회신한 겁니다. 당시 노르망디 지방에는 깊은 종교적 변화의 기운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루빌의 사제 기유베르가 이 움직임의 중심이었습니다. 장세니즘의 열렬한 투사 생 사랑의 제자이자 저명한 신학자인 아르노의 친구였던 기유베르는 피폐하고 가난에 허덕이던 이 지방에 신앙의 참신한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파스칼 일가가 이 새 바람에 직접 영향을 받은 것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1646년 1월 아버지 에티엔이 빙판에서 넘어져 발을 삐었을 때 그것은 놀라운 기회로 나타났습니다. 그는 장세니즘으로 회심한 두 젊은 형제 의사에게 치료를 받게 되었는데, 이들은 3개월간 파스칼 가에 머무는 동안 신의 은총의 사자가 되었습니다. 제일 먼저 회심한 것은 블레즈 파스칼이었고 자클린과 아버지가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해 말에는 루앙에 찾아온 페리에 부부(누이 질베르트 부부)가 회심하였습니다.

이때 파스칼이 경험한 회심은 어떤 성격의 것이었을까요? 우리는 이것을 생 시랑의 가르침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파리와 루뱅에서 신학을 공부한 생 시랑은 얀센(장세니우스)과 친교를 맺었는데 이들은 당시의 가톨릭 교회의 무력하고 해이된 상태를 개탄하며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신으로 되돌아 가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생 시랑의 <서한집>, <새 마음>, 등은 그의 신앙과 가르침의 심오함을 역력히 보여줍니다. <새 마음>이라는 표제가 암시하는 바와 같이 회심이란 새 마음으로 거듭나느 것을 의미하며 온 존재의 재생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자연적 마음이 이끌리는 <감각적 사물에 대한 애착>에서 죽고 <신에 대한 사랑> 속에 되살아나는 겁니다. 여기 신의 은총이 개입합니다. 이 은총, 신의 소명이 없는 한 그 어떤 행위도, 영성체까지도 선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가톨릭 내부에서 이 신앙의 내면화는 하나의 도전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원시 기독교의 순수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영적 신앙의 회복을 지향한 이 움직임이 점차 보수파들의 공격과 탄압의 대상이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 회심은 파스칼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요? 한때 이최초의 회심을 단순한 지적 동의로 해석하는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별 설득력이 없는 것으로 판정된지 오래입니다. 그의 회심은 정녕 회심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것이었으며 이것은 그에게 새로운 영적 세계가 열렸음을 의미합니다. 물론 그는 그 안에 몰입하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학문 연구는 계속되었고, 지성의 매혹은 여전히 그를 사로잡고 있었으며 때로는 세속적 영예에 눈이 어두워지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신의 부름을 받아 이에 응답하였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완성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제 막 첫발을 내딛었을 뿐이며 그가 가야 할 길은 아득히 멀었습니다. 그는 이 길목 어디선가 또 한 번 신의 강한 음성을 들을 수도 있을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 제2의 회심은 필연적입니다. 아니, 신에게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여정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회심은 기독교 신앙의 한 속성일 수도 있습니다.

1653년, 당시의 파스칼은 나이 서른으로 건강은 뚜렷이 회복되었고 어릴 때부터의 정신적 활력과 고귀함이 어떤 절정에 달한 것처럼 보입니다. 신앙을 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마음가짐이나 생활로 보아 기독교도라기보다 차라리 교양인에 더 가까웠다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자클린은 이때의 파스칼을 가리켜 <뒤끓는 감정>이라 표현하였고, 질베르트는 <벅찬 그의 지성은 그를 초조하게 만든 나머지 아무도 그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654년 초 이러한 생활과 정신의 기류에 어떤 심각한 변화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관해 질베르트와 주고받은 자클린의 서신은 귀중한 암시를 제공합니다. 가령, 1654년 1월 25일자의 편지는 파스칼이 지난해 9월 말 그녀를 찾아왔을 때 그녀에게 한 고백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연구활동, 사교계 사람들과의 교제 가운데서 극도의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신의 아무런 부름도 들을 수 없었다는 겁니다. 현실의 삶에 대한 혐오, 그러나 계속되는 신의 침묵 - 이 고뇌를 안고 파스칼은 빈번히 자클린을 찾았고, 명상과 기도를 계속하였습니다. 마침내 1654년 11월 23일 밤, 그는 뜨거운 감격과 환희 속에서 신의 구원의 손을 붙잡았고, 은총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이 밤의 경험을 황급히 양피지에 적었고, 그것을 죽을 때까지 남몸래 몸에 지니고 다녔습니다. <기쁨,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복종.....>, 이것은 무슨 신비주의자의 환각도 아니고 정신착란도 아닙니다. <메모리알> 가운데 정확히 적혀 있는 여러 성서의 구절들은 이것이 진지한 명상과 기도에 대한 신의 응답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파스칼은 다음해 1월 7일, 포르루아얄을 찾아가 약 2주일간 그곳에 머뭅니다. 이때 그는 드 사시를 만나 일련의 대화를 나눴는데, <드 사시 씨와의 대화>는 파스칼의 몇몇 기본적인 사상들을 밝혀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입니다. 우리는 그 글에서, 장차 파스칼이 준비하게 될 <호쿄론>의 주도적 관념들이 어떻게 태어났는가를 점쳐 볼 수도 있습니다.

제2의 회심이 파스칼에게 아무리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해도 과거와의 단절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회심 후에 그가 한동안 학문 연구를 멀리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교계와 완전히 결별하지도 않았고, 더더구나 포르루아얄의 <사나운 은사>가 되지도 않았습니다. 1655년 봄은 로안네 공의 저택에서 보냈는가 하면, 가까운 친구들과의 교우도 계속되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포르루아얄에서 고독한 명상의 삶을 사는 것보다 이 세상 한복판에서 무엇인가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기회는 의외로 빨리 찾아왔습니다.

1656년 1월, 포르루아얄에 잠시 머물렀을 때 파스칼은 당국의 눈을 피해 그곳에서 숨어 지내던 아르노를 만났으며, 이로써 그는 장세니스트들의 변호를 위해 논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습니다. <제1프로뱅시알(한 지방안에게 보내는 편지)>이 나온 것은 1656년 1월 말의 일이었습니다.

예수회와 장세니스트와의 대립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좁은 의미의 교리적인 대립이라기보다 기독교 신앙안에서 전통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상이한 두 경향 사이의 갈등이라 하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회가 인본주의의 영향을 받아 교리를 근대화하고 인간의 자유 의지에 입각한 유연한 도덕을 표방한 데 반해 장세니스트들은 초대 신앙의 영적 순수성과 내면적 도덕의 엄격성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미 16세기에 갈등을 빚은 바 있는 이들은 1640년대에 이르러 얀센의 유작 <아우구스티누스>를 계기로 격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예수회에서는 이 책의 내용을 이단이라고 몰아붙였고 이에 대해 생 시랑의 제자들, 특히 소르본의 신학 교수 아르노가 반격에 나섰습니다. 이들과 포르루아얄과의 깊은 관게는 마침내 이 수도원을 장세니즘의 총본산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교황과 왕을 등에 업은 예수회의 공세는 날이 갈수록 거세졌으며 불리한 입장에 몰리게 된 포르루아얄의 운명은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워졌습니다. 파스칼이 아르노의 요청을 받아 여론에 호소하는 대 캠페인에 나선 것은 이런 상황에서였습니다.

1656년 1월 23일, <제1프로뱅시알>이 발표된 후 1년여에 걸쳐 18편의 서한을 (처음에는 익명으로) 발표한 파스칼은 살벌하기까지 한 논쟁을 도맡아 장세니스트 변호의 선봉에 섰습니다. 사태의 추이와 돌발 사건들(그중 대표적인 것은 마르그리트의 성가시관의 기적)으로 인해 <프로뱅시알>은 주제나 어조에 있어서나 전략이 있어서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문제 제기의 교묘한 방식, 적의 허위와 기만을 파헤치고 그 정체를 폭로하는 치밀한 논리, 일격에 위장된 권위와 허세를 무너뜨리는 신랄한 풍자와 야유, 그런가 하면 진지하고 심도 있는 신학적 논의 등, <프로뱅시알>은 가히 사상과 문학과 설득술의 보고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갈수록 악화되었고, 포르루아얄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1657년, 예수회는 <아우구스티누스>에서 '5개 명제'를 끌어내어 그것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신앙 선언물>을 작성하였고, 이 선서문에 프랑의 전 성직자들이 서명하도록 강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서명은 장세니스트 사제들과 수녀들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시련이었으며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의견 대립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상급자에게 복종하는 뜻에서 서명하였으나 진리의 요청 앞에서 극심한 내적 갈등을 겪어야 했습니다. 파스칼의 누이 자클린은 이로 인해 상심한 나머지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서명에 찬성했던 파스칼도 제2의 선언문에 대한 서명이 결정되자 이에 강력히 반발하였습니다. <신이 진리를 알게 한 사람들, 진리의 수호자여야 할 사람들이 발뺌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사로잡혔다>이것은 파스칼이 포르 루아얄에서 아르노, 니콜 등과 격론을 벌이고 난 후에 적은 글입니다.

그러나 파스칼이 세상 속에 머문 것은 예수회와 싸우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더 큰 싸움이 있었고, 이것이야 말로 그가 포르루아얄에 은거할 수 없었던 진짜 이유입니다. 그는 기독교를 등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 없는 인간>을 향해 외쳐야 하고 가능하면 신과 함께하는 축복으로 인도해야 했던 겁니다. 예수회와의 논쟁을 끝으로 그는 죽는 날까지 <호교론>을 구상하고 집필을 준비하는 일에 전념합니다.

파스칼의 건강은 1659년 이래 현저하게 악화되었습니다. <병의 선용을 위한 기도>는 이때의 작품으로 짐작되니다. 그의 신앙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이 내적인 호소는 또하나의 회심을 생각하게 할 만합니다. 그 후 그의 관심은 신에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한 경건하고 금욕적인 삶에 집중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세상을 버린 것은 아닙니다. 포르 루아얄의 동조자였던 사블레 부인의 살롱에도 계속 출입하였고, 이때 귀족의 교육과 관련하여 <귀족의 신분에 관하여>라는 세 편의 논문이 씌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빈민 구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가까운 사람들을 설득하여 기금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난한 자들에게 가난한 자의 태도로 봉사하는> 개인적인 사업이었습니다.

1662년 6월, 집에 기거하던 가난한 일가의 어린이가 천연두에 걸리자 파스칼은 이들을 내보내는 대신 그 자신이 질베르트의 집으로 옮겨 갔습니다. 그 후 그는 졸곧 병상에서 떠날 수 없었습니다. 8월 17일, 심한 고통 끝에 경련을 일으켰습니다. 다시 의식을 회복한 파스칼은 임종의 종부 성사를 받고 24시간 후 숨을 거두었습니다. 1662년 8월 19일 새벽 1시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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