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횡무진 한국사, 8부 왕국의 시대 - 3장 군주 길들이기, 사대부의 승리②

종횡무진 한국사, 8부 왕국의 시대 - 3장 군주 길들이기, 사대부의 승리②

728x90

사대부의 승리②

물론 연산군 (燕山君)이 결함투성이의 폭군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또한 군주가 폭군일 경우 신하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도 세계 어느 나라의 역사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폭군의 대명사라 할 옛 로마 제국의 황제 네로의 경우에서 보듯이(『 종횡무진 서양사 』, 「뿌리 2」 4장 참조), 또 숱한 권력 다툼과 암살로 황궁이 조용할 날이 없었던 비잔티움 제국 황제들의 경우에서 보듯이(『종횡무진 동로마사』 참조), 중국 고대의 유명한 폭군인 은나라 주왕의 경우 에서 보듯이, 폭군이 타도되면 반란 세력의 리더가 새 왕이 되는 게 보통이다. 그래서 왕조 자체가 바뀌거나, 아니면 적어도 왕계의 혈통이 바뀌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점에서 조선은 세계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아주 색다르다. 쿠데타를 주도한 조선의 사대부 (士大夫)는 자기들 가운데서 왕을 선출하지 않고 기존의 이씨 왕실에서, 그것도 타도된 군주의 이복동생을 왕으로 삼은 것이다.

그 이유는 뭘까? 우선은 사대부들이 지향하는 게 유교 정치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향하는 사대부 국가 는 공화정이 아니라 엄연한 왕정이다. 그런데 유교왕국에서 왕이란 혈통이 고정되어 있고 세습되는 존재다. 따라서 아무리 사대부의 권력 이 막강하다 해도 왕위 세습 자체를 무시하면 안 된다. 만약 그럴 경우에는 왕조 자체가 바뀌어야만 하는데, 고려-조선의 교체가 그랬듯이 원래 역성(易姓)이란 대단히 큰 사건이다【이 점이 서양식 왕국과의 가장 큰 차이 다. 물론 서양식 왕국에서도 왕위의 세습은 있다. 예컨대 영국의 플랜태저넷, 튜더 왕조, 프랑스의 카페, 발루아 왕조 등은 모두 세습 왕조다. 하지만 중국이나 한반도의 왕조들과 달리 서양의 경우에는 왕조의 교체가 별로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저 왕조의 마지막 왕에게 직계 후사가 없으면 방계 혈통으로 왕조가 바뀌는 것뿐이다(후사가 자주 끊어진 이유는 그리스도교 의 법 때문에 국왕이 동양의 왕들처럼 많은 후궁들을 거느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보통 수백 년씩 지속되는 동양의 왕조들에 비해 서양 왕조들의 수명이 짧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그래서 사대부 (士大夫)들은 비록 연산군을 타도했으나 조선 왕조 자체는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의 쿠데타는, ‘반정’이라는 용어가 말해주듯이 실종된 정의를 되찾은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왕실 자체를 타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왕권 자체를 인정한 것은 아니다. 사대부들이 오직 연산군 (燕山君)만을 제거하기 위해 거사한 것이라면, 비록 지금은 성공을 거두었다 해도 향후 두 번 다시 그와 같은 폭군이 등장하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는 없다. 만약 또 다시 사화 (士禍) 같은 일을 걱정해야 한다면 아무리 유교 이념에 충실한 사대부라 해도 왕조 교체를 결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반정 세력이 연산군의 이복동생을 왕으로 옹립한 것은 앞으로 왕권을 확실히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라고 봐야 한다. 다시 말하면 중종은 그들의 꼭두각시라는 이야기다. 사실 중종은 그들덕분에 팔자에 없던 왕위를 물려받았으니 꼭두각시에도 만족해야겠지만.

▲ 부부의 소원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연산군 (燕山君)묘다. 그는 중종반정 (中宗反正)이 일어난 해(1506년) 11월에 유배지인 강화도에서 아내인 폐비 신씨가 보고 싶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과연 그가 죽고 나서 소원은 이루어졌다. 신씨가 중종에게 건의해서 연산군묘를 강화도에서 현재의 장소로 이장한 것이다. 사진에 보이는 두 개의 봉분은 그들 부부의 것이다.

인용

목차

연표

728x90

from http://leeza.tistory.com/37789 by ccl(A) rewrite - 2021-06-17 16:2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