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개념미술

일본 개념미술

日本概念派

Japanese Conceptualists

1960年代半ばから70年代初頭にかけて展開した、日本のコンセプチュアリズムの動向を呼称する言葉。

美術評論家の千葉成夫が 『現代美術逸脱史 1945~1985』(晶文社、1986)の中でこの言葉を規定しており、その代表的な作家として、松澤宥、高松次郎、柏原えつとむらの名が挙げられている。

同時期にアメリカで隆盛したコンセプチュアル・アートと併走するように、1964年6月1日、松澤は夢の中で「オブジェを消せ」という啓示を受け、言葉による作品を発表するようになった。これは、コンセプチュアル・アートの記念碑的作品である、ジョセフ・コスースの《1脚および3脚の椅子》(1965)が発表される1年前に起きた出来事であり、それゆえに、この動向はコンセプチュアル・アートの単純な「輸入」ではなく、日本独自の文脈から発生したものであることが強調されるようになった。

60年代半ばを代表する松澤の作品として、言葉が回遊式にレイアウトされた印刷物《プサイの死体遺体》(1964)を皮切りに、『美術ジャーナル』の誌面に広告として発表された《荒野におけるアンデパンダン’64展》(1964)、1967年から1年間、知人宛に発送された「ハガキ絵画」のシリーズなどがある。また展覧会としては、信濃美術館で行われた「美術という幻想の終焉」展(1969)、京都市美術館で行われた「ニルヴァーナ──最終美術のために」展(1970)などが知られている。

それらに続くかたちで、60年代前半にはハイレッド・センターとして「反芸術」の活動を展開していた高松が、60年代末から70年代前半にかけては《石と数字》(1969)、《この七つの文字》《These Three Words》(ともに1970)など、欧米のコンセプチュアル・アートの影響を受けた作品を発表。柏原は、「Mr. Xとは何か?」(1968-69)において制作過程を個から集団へと接近させる実験を行い、また「方法のモンロー展」(1973年)で「マリリン・モンロー」というアイコンを執拗に解体することによって「表現」の脱人称化を試みるなどした。

松澤から柏原へといたるこうした動きは、同時代に欧米で起きたコンセプチュアル・アートおよびミニマル・アートという「美術の極限化」(千葉)と比較されうるかたちで、日本概念派およびもの派を位置づけるという戦略的な布置でもあり、たとえば松澤自身は自らの表現を「観念美術」と呼ぶなど、必ずしも作家当事者が主体的に宣言したものではなかった点にもその特徴がある。

1. 온 카와라 On Kawara 河原温

1932년 일본에서 태어난 온 카와라(On Kawara)는 현대개념미술에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의 초기 회화는 구상적이었으나, 60년대를 지나 시간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화하는데 집중하면서 회화의 성격을 달리했다. 미학적 요소를 극단적으로 배제한 채, 표현의 도구를 숫자, 단어, 기호 등으로 제한했다. 캔버스에 머물고 있는 도시의 언어로 오늘의 날짜를 그려넣은 으로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개인적인 것이 노출되는 것을 극히 꺼려하여 인터뷰에 응하거나 이력, 사진 등을 공개하는 것을 거부하여, 작품 이외에 그를 알기란 굉장히 힘들다. 단지, 그의 작품의 특성 상 삶의 주기를 추측할 뿐이다. 그는 작년 이맘때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향년 82세).

1968년 봄, 온 카와라는 뉴욕의 아파트를 처분하고 멕시코 시티로 떠난다. 1년 동안 계속된 남미여행은 아내 히로코 히라오카와(Hiroko Hiraoka)의 신혼여행이자 자신이 구상한 예술적 콘셉트를 전개할 작업여행이었다. 그의 하루 일과는 이러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기상 시간을 확인한 뒤, 엽서 뒷면에 '나는 일어났다'라는 메세지와 일어난 시간과 장소를 고무도장으로 찍어 두 명의 지인에게 보냈다. 이는 프로젝트이며, 1970년부터는 '나는 살아있다'는 영문 메시지를 전보로 보내기 시작했다. 우체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신문을 사서 읽고, 읽은 기사를 스크랩했다. 이 후 시리즈를 제작했고, 날이 저물어 갈 때 쯤이면 지도 위에 하루동안 움직인 경로를 붉은 잉크로 표시하여 서류철하는 작업과 하루동안 만난 사람들의 이름을 타이핑하여 기록하는 작업을 했다. 각각은 , 일지로 알려져있다.

그는 자신의 일상을 작품으로 치환한 작가이다. 자신이 살아가는 지금, 자신이 일어난 시간, 자신이 읽었던 책, 자신이 지나쳤던 장소, 자신이 만났던 사람들이 그에게는 작품이었다. 또한 온 카와라에게 매일 매일 그린다는 행위는 시간을 잡아두고 싶은 욕구의 발현이다. 톱니바퀴처럼 이어지는 일상을 망각하기보다 기록함으로 기억하려하는 것이다.

나는 일어났다 I GOT UP

는 위에서 언급한 바대로 지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엽서에 일어난 시간과 장소를 고무인으로 찍은 다음, 지인들과 미술계 인사들 혹은 모르는 사람 2명에게 발송한 것을 한데 모은 작품이다. 전해진 바에 따르면, 79년 고무도장을 도둑맞은 뒤 엽서보내기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카와라는 와 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강조한다. 그는 삶과 죽음의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대해 탐구했다. 삶은 죽음이 있기에 비로소 완성된다고 생각했으며, 잠과 명상과 같은 잠시의 휴지상태도 일종의 죽음으로 보았다. 즉 그에게 하루하루 깨어나는 것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남을 의미했고, 그 순간을 엽서와 전보로 남기면서 자신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다시금 확인한 것이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태도는 일본문화로부터 배운 것이라 말한 바 있다.

오늘 연작 The Today Series

온 카와라는 1966년 1월 4일 뉴욕에서 '데이트 페인팅(Date Painting)'이라 불리는 을 시작하여, 죽는 날까지 작업을 이어갔다. 그는 을 시작할 때 부터 자신의 죽음과 함께 작품이 완성될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날짜그림, 일본에서는 일기회화로 말해지는 데이트 페인팅은 그레고리력(양력)에 따라 작품을 제작한 날짜를 캔버스에 그린 그림이다. 그는 작업에 일정한 원칙을 정해두고 따르는데, 그가 말하기를 날짜그림은 하루에 세 개까지 그릴 수 있으며 자정에 시작하여 다음날 자정까지 24시간 내에 완성되지 못하면 파기한다. 방랑가적 기질을 가진 온 카와라는 세계 곳곳을 유랑하며 작품을 제작했다. 이 때 시간표기법은 그날 있었던 지역의 표기법을 따른다. 날짜그림은 단색의 바탕 위에 제작날짜를 입히는 방식으로 만들어지는데, 캔버스에 5번 밑칠을 하고 날짜를 흰 물감으로 7번 칠한다. 캔버스의 크기는 20.5X25.5cm에서 155X225cm까지 다양하게 선택되었다. 또 각각의 작품을 보관하기 위해 신문지로 안을 덧댄 마분지 상자를 만들었다. 작업 초기에는 그림의 뒷 면에 당일 신문을 오래 붙이기도 하였다. 이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온 카와라의 작업은 캔버스에 시간을 붙잡아 순간을 담아내기 위함이었다.

온 카와라는 과 연계하여 1969년 을 만들었다. 1933년 12월 23일부터 시작되는 달력에 노란색, 녹색, 빨간색으로 표시를 남기는 것이다. 아무 작업도 하지 않은 날에는 노란색을, 날짜그림을 제작한 날에는 녹색을 칠한다. 또 복수의 날짜그림을 그린 날은 빨간색으로 칠한다. 간략한 자서전과 같은 이 달력을 만든 이유 또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자 함이었다.

나는 읽었다 I Read

나는 갔다 I Went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18349

2002년 3월 2일, 6월 5일 이틀간 그를 만나 각각 6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고 이후에도 그가 부연설명을 하려는 듯 나에게 전화를 걸 때마다 2시간 정도씩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일본어 억양이 강한 영어로 무슨 질문이든지 길게 대답했으며, 정작 요점을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여러 주제를 종횡무진하는 편이이었다. 신비한 유사과학이론을 좋아하고, 구지에프(Gurdjieff)의 소설『 손자에게 전하는 빌즈법의 이야기(Beelzebub’s Tales to His Grandson)』(1950)를 추천하기도 했다. 자신의 생각과 비슷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먼 거리를 마다않고 가는 여행자였던 그는 광주비엔날레에도 혼자 왔다 갔으며, 한국의 시인과 교류한 적도 있다고 했다. 이후 만난 미술계 지인들은 그에 대해 예술 이외의 노동을 거부했던 가난한 소호의 작가에서 뉴욕, 파리, 일본에 집을 보유한 성공한 작가로 변모했으며, 하루 2-3갑씩 담배를 피웠고, 일본에서 온 젊은 작가들을 도와주는데 적극적이었다고 전했다. 그 결과 나온 나의 논문「온 카와라의 유목적 정신: ‘세계시민’의 자서전(On Kawara’s Nomadic Mind: Autobiography of a ‘Citizen of the World’)」(2004)은 ‘초국가적 세계시민의 자서전’이라는 주제로 패전 후 일본을 떠나 탈 일본, 탈 중심을 화두로 삼고 세계의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그 도시의 언어를 통해 유동적이며 자유로운 예술가의 정체성을 확립한 그의 전 작업을 설명하고 있다.

2004년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 카와라 부부와 연락은 끊겼다. 그러나 소식은 계속 들려왔다. 2006년경 일본 친구를 통해 그가 부인과 이혼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사실 히로코는 1960년대 일본과 미국에서 예술가로 활동했으나 포기하고 남편과 두 자녀의 생계를 책임졌으며 이후 카와라의 매니저처럼 그의 커리어를 관리했었다. 카와라를 거의 그대로 빼닮은 아들 아키토 카와하라(Akito Y. Kawahara)는 현재 미국에서 곤충학자이자 교수로 활동하고 있으며, 새로운 나방을 발견하자 어릴 적 자신의 호기심을 길러주고 연구를 후원한 아버지를 기념하며 ‘온 카와라’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 양은희(1965- ) 뉴욕시립대 미술사 박사, 광주문화예술진흥위원회 실행위원 (2005-6), 인천여성미술비엔날레(2009) 커미셔너, 델코 스튜디오 디렉터(2008-12) 역임,『뉴욕, 아트 앤 더 시티』(2010) 저자. 현재 건국대 글로컬 문화 전략 연구소 연구교수.

現代美術作家の河原温は、6月27日にニューヨークで死去した。生没年月日は公表されていないが、2015(平成27)年にグッゲンハイム美術館(ニューヨーク)で開催された大規模な個展「河原温――沈黙」の図録に、上記の日付における略歴として「29,771日」と記されており、享年81であったと思われる。

河原温は、1951(昭和26)年に愛知県立刈谷高等学校を卒業して上京し、独学で絵画の制作を開始した。翌52年から56年頃までの約5年間に、日本美術会と読売新聞社のそれぞれの主催による二つのアンデパンダン展、「ニッポン」展、デモクラート美術展などの公募展やグループ展において、またタケミヤ画廊等で開催した何回かの個展を通じて、精力的に絵画作品の発表を行っている。この時期の河原の作品は、ロボットやマネキンを思わせる記号化された人体表現、遠近法を強調した空間表現、不規則多角形の変形カンヴァスや変形紙面の使用を特徴とし、非人間的でSF的な状況を不条理なユーモアとともに描出した具象的な絵画(油彩画および素描)であった。中でも「浴室」シリーズと「物置小屋の中の出来事」シリーズという二つの鉛筆素描連作(いずれも東京国立近代美術館蔵)は、戦後の閉塞した社会状況を象徴し、時代を代表する傑作として高い評価を受けている。油彩画としては「孕んだ女」(1954年、東京国立近代美術館蔵)や「黒人兵」(1955年、大原美術館蔵)などがある。

戦後世代を代表する新進画家として注目を集め、活躍が期待された河原だったが、少数の観客しか目にしない展覧会での作品発表という形式に限界を感じ、より広範な観客が鑑賞できる媒体として、50年代後半から「印刷絵画」の可能性を模索するようになった。これは、作家自身が製版・印刷の工程を監理しながら制作する、オフセット印刷による絵画で、作者自身によって書かれたテクスト「印刷絵画」(『美術手帖』誌155号、臨時増刊「絵画の技法と絵画のゆくえ」、1959年)に詳細が論じられている。

しかしながら、結局のところ河原は、全く新しい展開を求めて59年9月に日本を離れ、メキシコ、ニューヨーク、パリでの滞在を経て、64年秋からはニューヨークに定住することになる。この間の63年以前の作品についてはほとんど知られていないが、64年にパリおよびニューヨークで制作されたドローイングが200点ほど現存する。これらは言語をテーマにした作品やインスタレーション作品のプランが多く、50年代の東京時代の作品とは、すでに全く異なるものであった。65年にニューヨークで制作された作品は、カンヴァス上に文字を描いた作品や暗号を用いた作品であり、そして翌66年1月からは、単色の地のカンヴァスに白い活字体の文字で日付を書いた絵画作品、いわゆる「日付絵画」(「Today(今日)」シリーズ)の制作が始められることになる。

「日付絵画」は、ただ単に日付を描いた絵画ではなく、いくつかの規則に則って制作されているが、そのうち最も本質的なものは、描かれた日付の24時間のうちに制作が開始され、描き終えられ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ものである。すなわち、その正式タイトルが「Today(今日)」であることからもわかるように、描いている作家にとって、描かれる日付は常に「今日」で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り、描き終えられなかった場合は破棄される。それゆえ、一枚一枚の「日付絵画」は、作家がその日付の日に生存し制作したという、一種の存在証明のようなものとなる。日付は、作家がその日に滞在していた都市における公用語の一つを用いて書かれており、カンヴァスの大きさは、8×10インチから150号大までの8種類の中から選ばれている。画材はリキテックス社のアクリリック(アクリル絵具)で、赤と青は既成の絵具を混色せずに用いているのに対し、ダークグレーに見えるその他の画面の色彩は、その都度絵具を調合して色を出している。それゆえ、一見同じように見えるダークグレーの画面には様々な色調が認められ、「日付絵画」が作家の感情や気分、意識の状態を反映した「絵画」として制作されていることがわかる。絵画は自作のボール紙製の箱に納められ、箱の内側にはその日の新聞が貼り込まれている。「日付絵画」は、文字通り河原ライフ・ワークであり、亡くなる前年の13年までの間に3000点近い数が描かれたと言われる。

「日付絵画」に続き、河原は60年代の後半から、一連の自伝的な作品を制作した。その日に読んだ新聞記事をスクラップした「I READ」(1966年-95年)、起床した時刻をスタンプで記した絵葉書を友人に宛てて送り続ける「I GOT UP」(1968年-79年)、その日に会った人物の名前を会った順にタイプ打ちした「I MET」(1968年-79年)、その日に行った経路をゼロックス・コピーの地図の上に赤線で記録した「I WENT」(1968年-79年)がそれである。

一方、存在証明的な意味が最も強いのは、電報による作品「I AM STILL ALIVE」(1970年-2000年)で、「私はまだ生きている」という意味の英文の電報を間欠的に友人や知人に宛てて打電するものである。とはいえ、発信時点での発信者の存在証明は、受信者の時空におけるその不在を同時に喚起する。受信した時点で本当に「私はまだ生きている」かどうかはわからないのである。この構造は「日付絵画」とも通じるものである。というのも、66年以降、河原は、展覧会のオープニングなど公式の場に姿を見せることはなく、写真も公表していないので、描かれた日付の時点における作者の存在証明は、そのまま「日付絵画」の鑑賞者にとっての作者の不在をあらわにするからである。

「日付絵画」と一連の自伝的な作品のように、河原自身の生と密接に結びついた作品とは異なり、時間と人類を巨視的に捉えた作品が、「100万年」である。1ページに500年分の西暦の年号をタイプアウトし、それを2000ページ、つまり100万年分続けて、10巻からなる年号簿とした書物の形の作品で、過去編(1970年-71年)と未来編(1980年-98年)が制作された。人類そのものの発生から、現在を経て、その消滅までをも包含する時間が可視化されたこの作品は、見る者を超越的で宇宙的な視点に誘う。

晩年の河原温は、「日付絵画」の制作を続ける傍ら、展覧会への参加を極力限定し、最終的には二つのプロジェクトのみが残ることになった。一つは「100万年」の朗読のプロジェクト(1993年-)で、展覧会などの会場で「100万年」の一部を俳優や一般の参加者などが朗読したり、録音して出版したりするものである。もう一つは「純粋意識」(1998年-)と題された「日付絵画」を幼稚園に展示するプロジェクトで、人間に社会性が刷り込まれる以前の幼児期に「日付絵画」を直接的に経験させることを意図して、世界の20カ所以上で実施されてきた。これらはいずれも、他者の意思により、作者の不在のもとでも、おそらくは死後においても、実施することができるプロジェクトである。

「日付絵画」以降の河原温の作品は、文字や数字を用いているため、コンセプチュアル・アートの代表的な作例とされることが多い。しかしながらそれは、日々目覚めては眠りにつく人間の生を意識の明滅と捉え、それを誕生から死までの時間に、さらには人類の発生と滅亡という次元にまで敷衍するもので、個人的なものや日常的なものと普遍的なものや宇宙的なものとを直感的に結びつける、極めて独創的な形式であった。瞑想的な作品は、世界中で高く評価され、大きな影響を与えている。

2. 케이지 우에마츠 Keiji Uematsu 植松奎二

케이지 우에마츠 (b. 1947)는 사진과 영상, 조각 등을 아우르는 다양한 매체와 오브제를 통해 보이지 않는 힘과 그 관계를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신체와 오브제, 오브제와 환경, 혹은 그 모든 것 사이의 관계와 역할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지난 50여 년 동안 중력과 만유인력, 그리고 우주에 대한 물리학과 천문학적 관심으로 심화되었다. 자연과 지구, 우주와 같이 거대한 물질 혹은 비물질에 둘러싸여 있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탐구는 전시공간 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하는 소형 우주를 창조해내는 형태로 발현된다. 작가는 산업화와 발전에 대응하여 재료 자체와 그 속성을 탐구한 미술사조인 ‘모노하 (Mono-ha)’에 영향을 받아 오브제를 변형하는 방식보다는 오브제 그 자체를 활용하는 작업 방식을 취한다. 존재하지만 그 자체로는 보이지 않는 힘은 작가가 활용하는 다양한 오브제나 매체를 통해 인지 가능한 상태가 된다. 작가의 힘과 관계에 대한 탐구는 1970년대의 사진 작업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이는 작가의 관찰행위에 기반한다. 돌을 묶은 줄을 돌려 원을 그리고, 출입구에 팔과 다리로만 신체를 지탱하는 이미지 등을 통해 원심력, 관성의 법칙, 중력 그리고 인력 등의 보이지 않는 힘의 존재를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케이지 우에마츠는 38회 나카하라 테이지로 상 등을 수상했고, 2015년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한국) 2006년 오타니 기념미술관 (효고, 일본), 2003년 키타큐슈 국립미술관 (후쿠오카, 일본) 등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2020년 파리 모리타니 오키나/피에미테레인 국립미술관 (파리, 프랑스), 오사카 국립미술관 (오사카, 일본), 영국 왕립 조각가 소사이어티 (런던, 영국) 등에서 단체전을 개최하였다. 현재 런던 테이트 모던, 뉴욕 현대 미술관, 까르띠에 파운데이션, 스톡홀름 근대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있으며, 독일 뒤셀도르프와 일본 오사카를 기반으로 전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https://www.arariogallery.com/ko/artists/144-keiji-uematsu/

重力、引力、自然、地球、宇宙といった根源的なもの、原初的なものへの素朴な興味と深淵な眼差しで、円錐による彫刻、映像や生木を使ったインスタレーション、石を削り出した作品等、常に予定調和におさまらない表現領域を創出。国内外の美術館、ギャラリー、パブリック・スペースでの展示で高い評価を獲得している。

2013年には彫刻作品を対象とする国内で最も権威のある賞「中原悌二郎賞」を受賞する。現在は大阪とパリ、デュッセルドルフに拠点をかまえ、精力的に制作活動を続けている。

3. 荒川修作 あらかわ しゅうさく

https://opusyonsei.tistory.com/tag/불편한%20집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tmart0302&logNo;=221005231974&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kr%2F

https://www.6sqft.com/bioscleave-house-uses-architecture-to-extend-lifespans-and-stregnthen-immune-systems/

4. オノ・ヨーコ Ono Yoko

1971년, 오노 요코는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1인 퍼포먼스를 벌였다. 뉴욕 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 이하 MoMA)의 간판 앞에서 오노 요코는 알파벳 ‘F’가 쓰여진 커다란 사인을 들어올려 마치 ‘현대 방귀관’ (Museum of Modern Fart)처럼 보이도록 했다. 이후 그 사진을 담은 전시 카탈로그를 제작했고, 심지어 와 에는 광고도 게재했다. 그녀는 카메라맨이 MoMA를 나서는 관람객들에게 자신의 전시를 보았는지 물어보는 영화도 만들었다. 영화 속에서 관람객들은 전시를 보았다 혹은 보려고 했지만 결국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지만, 사실 그 누구도 요코의 전시를 관람할 수 없었다. 매표소 창구에는 ‘여기 아님(This Is Not Here)’이라고 쓰인 요코의 광고만 붙어 있을 뿐이었다.

‘현대방귀관’은 개념미술 선구자인 요코의 여러 대표작 중 하나에 불과하다. 1960년에 요코는 당시 뉴욕의 허름한 동네였던 트라이베카의 온수도 나오지 않는 좁은 방에서 뉴욕 아방가르드 모임을 개최했고, 본격적으로 개념미술 활동을 전개했다. 존 케이지와 라 몬테 영이 이 모임의 대표 멤버였으며, 마르셀 뒤샹, 요셉 보이스, 막스 에른스트, 페기 구겐하임도 모임에 참여했다. 1971년 MoMA에서 게릴라 해프닝을 펼친 오노 요코는 44년이 흐른 뒤 MoMA로부터 정식으로 전시 요청을 받았다. 5월 17일에 열린 에서는 오노 요코가 미술의 새로운 형식을 창조해내고 자신만의 개성을 찾던 1960년에서 1971년까지의 기록이 담겨 있다. 이번 전시에는 그녀가 개념 미술에 영향을 미쳤음을 잘 보여주는 각종 텍스트 작업, 사물, 퍼포먼스, 녹음, 실험영화 등이 소개됐다.

도쿄에서 태어난 오노 요코는 1950년대 중반 뉴욕으로 이주해 세라 로런스 대학에 입학했지만 실험 예술에 빠져들었다. 당시 요코는 초기 플럭서스 화가, 시인, 음악가 중 보기 드문 여성 예술가였다. 조지 머추너스는 플럭서스 운동이 시작되기 이전인 1961년에 요코의 첫 단독 전시회를 열어주었다. 오노 요코는 관람객들이 일본식으로 염색한 천에 물방울을 떨어뜨리고 그림 위를 걷도록 유도했다. 이는 일본의 가톨릭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그림을 밟고 지나가도록 강요받고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처형되었던 17세기 역사를 빗댄 것이었다. “가톨릭 신자들의 용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어요.” 요코는 최근 인터뷰에서 말했다. “중학생 때 그 이야기를 처음 듣고 나도 언젠가는 그런 용기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요코의 초기 작품은 예술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개념을 전달한다는 면에서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1964년에 발간된 저서 에서 요코는 자신의 미술과 음악 작품을 따라 하는 방법을 공개했다. 책 속에는 ‘당신의 사진과 그림을 누구나 따라할 수 있게 내버려두세요. 원작이 파괴되는 힘을 느껴보세요’라는 문구가 있다. 이런 방식을 통해 그녀는 예술가로서 작품에 미치는 통제력을 오히려 내려놓을 수 있었다. 완성된 작품을 관객 앞에 내어놓는 대신, 관객의 참여를 통해 작품을 완성시키고자 한 것이다. 요코의 퍼포먼스는 1964년 일본 교토에서 처음 공개되었으며, 이듬해 뉴욕 카네기홀에서 다시 한번 무대에 올랐다. 이 퍼포먼스에서 그녀는 무대 한가운데에서 관객들이 가위로 자신의 옷을 잘라내도록 유도했다. 페미니즘이 본격적인 논의 주제로 떠오른 당시, 요코는 이미 여성의 신체를 예술과 시위의 수단으로 활용한 셈이다.

http://www.wkorea.com/2015/07/29/진정한-아티스트-요코-오노/

https://youtu.be/7Y0zPVqQ-O0

+) 이불 작가님이 생각난다..

5. 松澤宥 まつざわ ゆたか

마츠자와 유타카는 1970년경부터 집단적인 공동의 예술 형태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모든 계층구조와 차별을 없애는 공동 예술 실천을 펼쳤고, 궁극적으로는 인류 낙원의 환영과도 같은 공동체 미술을 지향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자연 속에서 예술가들이 모여 공동의 교감을 추구한 다. 이는 울창한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자연의 소리를 들으면서 하나가 된 느낌을 공유했던 공동 예술프로젝트였다.

6. 河口龍夫 かわぐち たつお

가와구치 다츠오는 일본 현대미술의 대표작가 중의 한사람이다. 그는 초기의 회화시리즈로부터 시작하여 1965년에 결성되었던 그룹〈位>와 1970년의 도쿄 비엔날레(제10회 일본국제미술展)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관계」시리즈로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다. 이번 전시는 작가가 1970년 전후부터 작품의 중요한 컨셉으로 사용해오고 있는「관계」시리즈를 중심으로 전시된다. 사실「관계」라고 하는 언어는 추상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그것을 어떤 구체적인 이미지로서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관계」라는 언어는 작가 가와구치 다츠오만의 독자적인 그 어떤 내용도 결코 아니다. 그것은 1960년대에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의 미술가들 사이에서도 거론된 바 있는 주요 이슈중의 하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전시가 그의 「관계」시리즈에 주목하고 있는 것은 언어와 시각의 “관계”를 풀어나가는 그만의 독특한 관심에 기인한 것이다. 「관계」시리즈와 함께 1983년 이후부터 그의 작품은 흙, 물, 나무, 공기, 화석, 여러 종류의 씨앗(種子), 버스, 서류, 지도, 백과사전, 밀납, 천연황토, 피아노, 침대, 여행가방, 농기구 등 그 소재의 폭이 넓고 매우 다양해진다. 금속이나 밀납으로 봉인한 작품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동이나 철, 아연 등의 물질을 옆으로 포개거나 위로 쌓는 등 병렬적인 설치작품, 또 밀봉해버리거나 덮어버리는 방법 등 다양한 작업방식이 선보인다. 또 작가는 80년대 초부터 씨앗(種子)에 착안해 생명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죽음이라는 인간의 자연순리가 시간의 흐름을 통하여 자각하게 하는 일련의 과정미술(Process Art)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여기서 작가가 의도하고 있는 것은 생(生)의 일회성(一回性)에 대한 강렬한 내면적 감정 표출이다. 생명체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초자연적인 힘에 대한 일종의 오감을 초월한 장치와 또는 제작이라는 작품의 언어로 대변해 주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에 작품을 보면 마치 과학 실험과도 같은 신비함을 자아내게 하고 있어 감동을 더하게 해준다. 주제가 의도하는 것처럼 작가의 표현대상은 그의 생활 주변에 있어서의 모든 시간과 공간의 관계를 표현하려는 데 있다. 특히 그는 지구의 역사를 포함한 자연의 모든 삼라만상에 대하여 관심과 흥미를 갖고 있으며 그것이 또한 그의 작품의 대상이며 소재이기도 하다. 게다가 소재로서 선택된 것은 진귀한 물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상 생활 속에서 언제나 느끼고 체험하는 것들이다. 자연과의 밀접한「관계」를 하나의 물질을 통하여 눈에 보이는 형태로 만들어내는 그의 작업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은 사람의 힘이나 어떤 도구라기보다는 오히려 에네르기이자 자연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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